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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팬픽 2 <새벽울음>



Podi 님 작품
 

 새벽울음


 온갖 오물로 덧칠된 벽, 매캐하고 달큰한 연기가 흐드러져 새어나오는 금 간 유리창을 묵묵히 바라보던 발렌시아는 도로 시선을 물렸다. 분명 쉬이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지금의 우선순위는 따로 있었다. 해가 뜨길 기다리려면 두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 그대로 해가 떴다가는 잉그레는 한바탕 뒤집어질 것이다. 라퀼라에서 선잠을 자다가 그대로 끌려나온 발렌시아는 폐하께서 공을 직접 지명하시는 메모를 남기고 가셨다며 재차 당부하는 시종장의 염려를 뒤통수에 매달고 나와 뒷골목에 서있었다.

발렌시아는 더 이상 시선을 돌리는 일없이 묵묵히 발걸음만 옮겼다. 빠르고, 자로 재면 분명 한 치 어긋남이 없을 엄격함. 대나무의 불거진 마디. 뒷골목의 백성, 포주나 창부, 손버릇 나쁜 꼬마나 갈 길 머잖은 노파가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는 눈을 빛냈다가 수그러들었다. 타고난 기품, 이제까지 살아온 환경에서 비롯된 당연한 고압적인 자기애가 그들에게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차가운 불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발렌시아가 제 손에 쥐인 종이조각을 두 번 내려다보는 일은 없었다. 우습게도 발렌시아는 이 뒷골목이 조각길 마냥 훤했다. 앙히에가 밤마실이랍시고 그토록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허다하게 포주 노릇을 했던 곳이니 모를 리가. 뒷덜미를 잡아채고 오던 기억이 선연하다. 칼자루가 제 주인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팔에 부딪혀, 순간 덜컥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 걸음이 머뭇거리는 일이 두 번은 없다. 이미 다 도려낸 속이다. 저를 잡고 있던 끈마저 잘라냈는데, 더 그러쥐고 있어 무엇 할까.

발렌시아는 허름한 이층 집 앞에서 멈추고 누런 이끼가 들러붙은 문을 칼집으로 두드렸다. 자다가 깼는지 험악한 얼굴을 한 포주가 문에 달려있는 작은 창을 열었다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대번 창백해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빈 쌀독 속의 쥐처럼 바짝 골은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가 얼룩덜룩 달아오르며 흘낏흘낏 눈치를 살핀다. 주방에서 살집 두툼한 중년 여자가 머리카락을 부석거리며 나오다가 그를 보고는 입 언저리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도로 주방으로 쏙 들어갔다. 발렌시아는 포주가 허리를 조아리며 알려준 방으로 향했다. 삐걱, 삐걱. 계단에서 나오는 것인지 방 안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는 고단한 비명이 고요한 새벽을 조각내어 놓는다. 발렌시아는 노크한다. 답이 없다. 하지만 익숙한 일이다.

 “후에 치죄하십시오.”

역시 답이 없다. 발렌시아는 공손히 문을 열었다. 의외로, 눅진 곰팡이 냄새가 제일 먼저 풍긴다. 그 의외는 물론 집무실을 빠져나와 이곳까지 와놓고 목적을 이루지 않은 주인에 대한 의아함이다. ‘못’한 것이 아니고 ‘안’한 것이지, 못 이룰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의 의문은 품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에 머리를 들이댈 자격은 가지고 있지 않는다. 발렌시아는 발을 옮기자마자 칼집을 내려찍었다. 털이 억센 주먹 크기의 쥐가 비명도 못 지르고 절명했다. 발렌시아는 그제야 시선을 정면으로 맞췄다. 상체는 벌거벗은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일부러 물들인 티가 역력한 금발은 그 밑에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는 직조한 태양에 비하면 병아리 솜털 정도로 보였다. 발렌시아가 여자가 겁먹은 이유가 자신이 들어오고 이상할 정도로 긴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발렌시아는 스스로에게 미약한 조소를 보냈다. 전장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몸이 안온함에 젖어 새벽잠이 이토록 늘었나.

 그는 침대로 다가가 여자에게 눈짓했지만 벌써 어깨가 뻣뻣한 여자는 도리질을 했다. 소담스레 봉긋한 가슴이 정말 갓 난 병아리가 겁에 질려 파르르 떠는 것 같다. 그 옆으로 흘러내린 날개가 꼿꼿해진다. 발렌시아는 여자의 하반신으로 눈을 내렸다가 냄새를 맡기만 해도 혀끝이 아려오는 단내에 조금 고개를 젖혔다. 그러자 오히려 초점이 제대로 맞춰진다. 지고한 잉그레의 주인은 여자의 다리를 베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여자의 엉거주춤한 자세와 침 자국이 선연한 둥근 콧대를 보아하니 아예 작정하고 자러 온 모양이다.

 “폐-”

 발렌시아는 제 벌거벗은 앞섶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왕이 이불을 깔고 누워있었다) 애써 고개를 돌리는 여자를 내려다보고는 과감히 대명사를 뺐다.

 “가셔야 합니다.”
 “젠장……머리가 다 울린다. 소리치지 마라.“
 “송구합니다.”

 발렌시아는 침대에서 내쳐져도 용케 깨지지 않은 술병을 집어들고 냄새를 맡았다. 역시나 당밀주였다. 

 “라플라스를 드셨나.”
 “아뇨, 권해드려도……저기…….”

 당밀주라고는 해도 상당히 독한 밀주라, 변변한 안주도 없이 마셨다면 지금쯤 속에 버터를 가득 채워 넣은 기분일 것이다.

 “안주를 드시지 않았나.”

 여자가 머뭇거리더니 이내 미간을 찡그리고 마지못해 말했다.

 “필요 없다고 하시면서……제 사탕과자를…말렸는데….”
 “…….”

 당밀주에 사탕과자.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린다. 어제는 바람기가 잦아든 대신, 무모한 호승심이 돋았던 모양이다. 발렌시아는 왕의 안위가 몹시 염려되었다. 그가 모를 리가 없다. 분명-

 “오늘 연회가-”
 “알아. 그거 갖고 왔냐?”
 “…….”
 “정작 필요할 때는 왜 이 모양이냐.”
 “송구합니다.”

 찬란한 금실뭉치가 여자의 무릎 위에서 벗어나 시트 위를 주르륵 미끄러졌다. 여자는 황급히 이불을 끌어당겼다. 의외로 아귀힘이 우악스럽다.

 “으악.”

 냄비 속 개구리마냥 흐느적거리던 왕은 숨 막히는 불평과 함께 좁은 침대 끝으로 굴려졌다. 발렌시아가 제때에 손을 내밀어 그 머리를 받았다. 금실이 손에 감겨든다.

 “가셔야 합니다.”
 “누가 안 간댔나……아, 기껏 왔으니 하고 갈래? 양보하마.”
 “저는 모시러 왔을 뿐입니다.”
 “명령이라면 어떡할 테냐, 발렌시아 마조레 기지 얀 미라이예.”
 “…….”

 왕은 반쯤 입 안으로 삭히는 부정확한 발음이었지만 바다 깊숙이서 퍼올린 것 같은 새파란 벽안은 그의 얼굴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기왕 온 김에 전장에서 묵은 때나 좀 벗기는 게 어때.”
 “폐하.”
 
 발렌시아는 자신이 입 밖에 낸 한 마디에 대경한 여자를 흘낏 돌아보았다. 닳고 닳은 창부가 이불을 끌어당겨 앞섶을 가리는 수줍음이 답지 않다 여겼건만 확실히 제 잇속을 차릴 만큼의 교활함은 있는지 제가 물건처럼 떠넘겨진다는 수치심으로 붉혔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비굴함과 욕심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여자는 꽁꽁 두르고 있던 시트를 슬쩍 느슨하게 그러쥐고 제 벗은 어깨를 드러냈다. 국왕의 여자가 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일인지상 만인지하인 유일공작에게 안겨 운이 좋으면 팔자를 고치거나, 아니어도 제 몸값 정도는 쉽사리 받아낼 수 있겠지. 약간 멍한 얼굴에 그는 그대로 즐기고 그녀는 그녀대로 화대를 후하게 받는 것이 피차 좋은 일 아니냐는 뻔뻔스러움이 연기처럼 스며든다. 발렌시아는 그 ‘일상’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분명 여자는 젊고 교태롭다. 도자기 같은 흰 피부가 등불의 빛에 반사되어 물고기의 비늘처럼 유연하게 빛났지만 발렌시아는 그것을 보고도 아무런 흥이 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카리도 그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그는 머리를 푸르르 떨고는 혀를 찼다.

 “가자.”

실망한 표정의 여자에게 발렌시아는 자카리의 외투를 챙기며 묵직한 주머니를 던져주었다. 얼른 잡아챈 여자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하지만 얼굴 한 구석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어서 그를 의아케 했다. 만족하고도 남을 금액이다. 그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과한 물욕인가, 아니면 그저 높은 지위에 있는 자에게 안기고 싶은 허영심인가?

 “안 와?”

발렌시아는 여자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그 수만 명 분의 시선에 여자는 지레 겁을 먹고 아무에게도 토설하지 않겠다 제 어미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발렌시아는 그쯤에서 만족하고 잠자코 자카리의 뒤를 따랐다. 계단을 내려가고, 문을 열자 끝무리가 옅어진 하늘이 보였다. 술에 취한 걸음이어도 충분히 해가 뜨기 전에는 잉그레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자카리가 발렌시아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발렌시아.”
 “예.”
 “나는 이제 자리를 잡을 거다. 그럴만한 여자를 봤어.”
 “…….”

발렌시아도 자카리가 얼굴까지 붉히며 열심히 토로한, 조각길에서 본 수수께끼의 미녀의 정체를 대충 알아차리고 있었다. 십대 후반, 백금발, 조각길.

 조각길. 발렌시아는 눈을 감았다. 겨우 왕도로 돌아온 레아가 단순히 호기심으로 조각길에 발을 들였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필시 그 아이가 이 왕도에 발을 들인 것이다.

 “너는 어쩔 셈이냐? 대공작도 두 손 들었겠다, 언제까지 마음 놓고 뻗대게?”
 “제 식견이 충분치 않아 공비를 맞을 수가 없을 뿐입니다.”
 “핑계 한 번 탁월하다. 차려준 밥상도 마지못해 수저를 드는 녀석이 식견을 어찌 쌓게? 식견이 낙숫물 떨어지듯 절로 쌓이는 건줄 아나?”
 “폐하, 저는 제 의무를 분명 다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만 좀 쪼아대라?”
 “…….”

자카리는 아득해서 눈을 감았다. 저도 사랑에 빠졌다고 이 만년설 같은 남자한테 뭔가 훈계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늘 그랬듯, 씨알도 안 먹힌다. 자카리는 쌩하니 사라지던 앙히에를 떠올렸다. 그놈은 무슨 간덩이로 리베 톨레도까지 불러내서 설치나.

 “발렌시아.”
 “예.”
 “너 연회 나오지 마라.”
 “예.”

예상의, 예상외의 평온한 답이라 자카리는 결국 돌아보았다. 마악 밝아지는 하늘의 옅은 빛에 밀랍 같은 얼굴의 윤곽만 점점이 이어져 보인다.

 “내가 왜 오지 말라고 하는지는 알고 답하는 거냐?”
 “저는 폐하께서 명하신 것에 복종할 뿐입니다.”
 “아냐고 물었다.”
 “저는 감히 폐하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관둬. 앙히에 때문이다.”
 “과한 오해십니다, 폐하. 제가 잉그레에서 감히 검을 들일은 결코 없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해가 안 간다. 너는 왜 앙히에를 아예 ‘지우려’ 하나? 잘라내어 미라이예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으면 충분하다. 발렌시아, 넌 과한 걸 넘어서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이 보이는 걸 알기나 하는 거냐.”

발렌시아는 진지한 얼굴의 자카리를 마주보았다. 신에게서 내려온 금발만 어슴푸레한 어둠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또 그놈의-”

자카리는 말을 뚝 멈추고 걸음을 옮겼다. 삼곽이 보인다. 자카리는 마지막 패를 꺼내 들려하는 것처럼 숨을 조금 몰아쉬었다. 자신은 취했고, 지위는 둘째 치고 취객의 권리란 이럴 때 유용한 것이다. 설마 이놈이 내 뒤통수를 후려치진 않겠지. 그리고,

 “리베 몬테.”

 침묵. 자카리는 재차 말했다.

 “리베 몬테.”
 “…….”
 “나는 네가 한 소리 안 믿는다.”
 “사실입니다, 폐하.”
 “네가 말하고 싶은 사실이겠지. 내 앞에서까지 그렇게 착실한 거짓을 말할 정도로, 충격이었냐?”
 “…….”
 “앙히에는 도망쳤다. 분명 그 녀석은 천 번의 똑같은 상황이 주어져도 천 번 똑같은 선택을 할 거다. 하지만 그 여자가 아니었다면 너는 이토록 네 하나뿐인 네 동생을 지워내려 갖은 힘을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내가 과하냐.”
 “예.” 
 “…….”
 “고인에 대한 예를 지켜주십시오, 폐하. 앙히에와 리베 몬테는 하등 관련이 없습니다.”

 저를 보는 그 자카리는 당밀주 때문이 아니더라도 속이 답답했다. 역시 이 녀석에게도 술을 진탕 먹였어나 했나. 하지만 뭘 어떻게 해도 이 남자가 제 속을 털어놓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섭섭하면서도, 억울하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차라리 이 남자를 온전히 움켜쥘 사람은 결국 자신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써,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 이 뼛속까지 기사인 남자에게 뭔가 꼭 안겨주고 싶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쭉 얼굴을 마주한 보람이 없잖은가. 아, 브레타냐 녀석과 반씩 섞어보았으면 좋겠군. 아니, 그것도 그것대로 두렵지만 어쨌든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일곽. 그들을 보았는지 근위병들이 일렬로 사열하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달려 나올 시종장의 혈압을 생각하니 조금은 미안해졌다. 하지만 잉그레에서 여자를 끼고 술을 마셨다는 소문이 나면 곤란하다. 성깔이 보통이 아니었는데, 괜히 책잡힐 일은 않는 게 좋지.

 “폐하.”
 “응?”
 “드십시오.”

발렌시아가 내민 것은 금박이 입혀진 종이에 쌓인 작은 환약이었다. 자카리는 그것을 멍하니 보다가 입을 벙긋거리며 발렌시아에게 삿대질을 했다.

 “야, 너!”
 “치죄하십시오.”
 “없다며!”
 “없다 말씀드린 기억은 없습니다. 감히 폐하의 심중을 멋대로 헤아린 죄입니다.”
 “뭐? 허? 허어어-욱…….”

발렌시아는 허리를 굽힌 그가 앞으로 자빠지지 않도록 어깨를 잡아주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오늘 하루는 저택에서 근신하겠습니다.”
 “너-어디서 그런-욱, 으읍!”
 “폐하를 모셔라.”
 “감사드립니다, 공작. 이런, 이걸 아직도 안 드셨습니까, 폐하. 이리 주십시오, 공작.”
 “…….”

버선발로 달려나온 시종장이 자카리를 부축하며 발렌시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하, 야, 너, 연회 끝나고, 곧장, 우으읍!”
 “예. 연회가 끝나면 알현을 청하겠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허, 가! 와, 그렇게, 안 봤는-”

자카리가 시종장에게 끌려가다시피 부축을 받으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하늘이 훤하게 밝아져 있었다.

 어디선가 길고 긴 닭 울음이 들려왔다. 자카리는 멍하니 그 파편을 주워모았다. 숙취로 멍한 머리에 커다란 종이 울리는 것 같다. 아니, 단지 숙취만은 아니라서 그럴지도.

 “우윽, 시종장.”
 “예, 폐하.”
 “오늘 연회복은 정말로, 저엉말로 잘 고르라고 말해두게. 기왕이면 성격 괄괄한 여자 취향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