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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팬픽 특별 <버베나 봉오리>


ClaireLyn 님 작품


<버베나 봉오리>

  딤니팔의 봄 햇살이 응접실 안으로 물결치듯 떠밀려들어왔다. 레아는 멍하니 제 손을 들어 그 햇살에 비추다 혼자 피식 웃었다.
  여타 리베들과의 대단찮은 담소 시간이 끝나고 리베들이 꽃 찾아 나는 벌처럼 제각기 흩어진 후였지만 그녀는 드물게도, 아주 드물게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 대낮의 고양이처럼 소파 위에 늘어져 있었다. 평소라면 단초도 참지 않고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오지랖이라도 떨었겠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런 기분이 나지 않았다. 어깨까지 오는 옅은 머리채가 자주색으로 염색한 소파 위에 흐트러져 더욱 도드라졌다. 입만 다물면 나름 청순고결한 리베처럼 보일 것 같기도 한 것 같기도 어쩌구하는 앙히에의 이죽거림 그대로, 마치 귀족가의 영양이 잠시 놓아둔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
  기운 넘치게 싸돌아다니기로는 딤니팔 리베들 통틀어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절대일위를 고수할 레아가 오늘 따라 이리도 널부러져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아마도 조만간 시작할 달거리.
  물론 레아는 여타 여인들에 비해 월경시 아픔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칠 년간 뽈뽈거리며 알로지아드 가도를 누비고 봄 알로지아드 뒷꽁무니를 내내 졸졸 따라다닐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강세가 들어가야 할 분은 단연코 '내내'다. 레아는 자신이 예의 가출한 이후 알로지아드 졸피에 석 달 이상 머문 적이 있었나 고민해보았다. 물론, 당연하겠지만, 없다. 있는 게 이상하다.
  각설하고, 그렇게 월경통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그렇다고 그 전에 찾아오는 불쾌함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늘어지고 짜증나고 우울하고 힘들고 게다가 식욕은 쓸데없이 폭증. 레아는 조금 씁쓸한 얼굴로 방금 전 담소에서 자신이 도대체 얼마나 쿠키 그릇을 비웠나 생각하다가 짜증스레 제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래도 나름 마른 편이라고 자부해왔는데 이러다가는 금세 몸무게가 불겠다. 이러다가는 자카리한테 살 좀 빼라고 잔소리도 못 할 것 같았다. 빌어먹을 생리 전 증후군.
  덕분에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 늘어진 지 벌써 반 시진은 지났나.
  그녀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치밀어오르는 짜증과 분노가 신경줄을 툭툭 건드렸다. 리베들한테 화풀이를 하지 않은 게 그녀가 발휘한 마지막 자제심일 것이다. 덕분에 지금은 완전히 방전 상태였다.
  그리고 둘째는, 굳이 말하자면 첫 번째 이유와 연관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초경 이후 그녀 인생에 월경이 멎었던 적은 그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를 떠올리는 순간 불만이 가득했던 레아의 얼굴이 금세 가라앉았다. 몰아치던 파도가 썰물 적 되어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젖은 모래밭만 남은 듯 적요해진 표정. 그녀는 다시 멍하니 제 손을 응시하다가 자신이 아까부터 이 짓을 열댓 번은 반복했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혀를 찼다.
  그리고 사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기 싫어서 한참이나 소파 위에서 빈둥거렸던 주제에 정작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태도 자체는 단호하고 경쾌했다. 소파에서 내려온 레아는 누워서 부비적대느라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하고 흐트러진 옷차림도 대충 수습한 다음――어디까지나 대충이지만――횅하니 몸을 돌렸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가벼운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서 잉그레의 복도를 헤집는다. 목표로 하는 방향은 명확했다.



  "레아는?"
  "송구하옵니다. 비전하께서는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자카리는 걸음을 멈췄다. 조금 전까지는 연일 격무에 시달리느라 피곤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는데, 이제는 그에 옅은 불꽃 하나가 더해진 모양새다.
  "없다고? 저녁도 안 들고?"
  "생각 없으니 찾지 말라 하시는 친전을 놓아두셨습니다."
  그는 잠시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시종을 돌아보았다. 이내 약간은 짜증스런 대꾸가 떨어진다.
  "그래서 여태 찾지도 않았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하오나 비전하께서 장묘에 가 계셔서……. 심기가 불편하신 듯하여 차마 모셔올 수가 없었습니다."
  "……."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자카리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 슬금슬금 몰려온 어둠이 주홍빛으로 물든 태양을 핍박하며 황혼 자락을 몰아대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대충 시간을 가늠해보다, 낮게 한숨을 쉬고, 이내 스르르 몸을 돌렸다.
  "짐이 데려올 테니 평소처럼 준비해 두게."
  시종장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두하고 몸을 돌렸다. 자카리는 그게 자신이 묘에 직접 행차하는 사실에 대한 옅은 불만 표시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행동 역시 변할 게 없다는 건 뻔한 일이다.
  그는 잠시 피곤한 듯 제 얼굴을 쓸고는 아마 레아가 밟았을 그 길을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묘에는 이름이 없다.
  죽어서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주면 힘을 얻어 왕가의 재앙이 되리라 여겼기에 사산한 아이에게는 이름을 주지 않는다. 노아예의 가호를 받지 못한 아이. 산테카를로 왕계에서 거부당해, 축복받지 못한 아이.
  "아가."
  레아는 소담스레 그 앞에 주저앉았다.
  "엄마 왔어."
  옅게 일어난 잔디가 부는 바람에 촐랑거리다 누그러졌다.
  묘 주변에는 보랏빛 버베나가 산방상(散房狀) 모양으로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늘고 긴 꽃봉오리들이 평면상에 모여 뭉우리돌처럼 동글동글 몽쳐있다. 회녹색 줄기와 이파리 위에는 옅은 털이 가득 나 있어 매만지자 깔깔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직접 심은 꽃이다. 매번 묘를 찾아올 때마다 하얀 백합이나 놓고 가느니 차라리 사시사철 함께하는 일년생 꽃들을 곁에 두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벌써 제법 세월이 지난 일이다.
  그 사이 베버나는 두 번째 개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레아는 가만히 줄기를 쓸어내리다 봉오리 달린 줄기 하나를 슬쩍 꺾었다. 톡 뜯겨 나온 자국이 매끈하다. 그녀는 그 꽃을 제 손에 쥐고 옴찔옴찔거리다 이내 허리를 폈다.
  "……오랜만이지?"
  "……."
  "꽃 피면 그때는 좀 더 자주 올게."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다리를 모아 그 위에 제 팔과 턱을 괴었다. 그리고 그대로 움직임이 없었다.
  장소만 가리고 본다면 마치 가볍게 정원으로 나들이라도 나왔다가 잠시 어딘가에 기대어 잠이 든 귀족가 리베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고, 허나 그렇다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무슨 말 따위 필요 없기도 했다.
  햇살이 천천히 기울었다. 오후에 비스듬하게 내려꽂히던 빛줄기가 점차점차 내려앉다가 이내 붉게 물든다. 태양이 물러난 지점으로 슬금슬금 어둠이 몸을 풀었다. 짧았던 그림자가 이내 길게 늘어지는, 그만큼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레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세로 만들어진 조각상인듯 마냥 굳었다. 가끔 바람 한 터럭 스칠 때마다 어깨에 아슬히 닿을 만한 머리칼이 조금 흔들리는 게 다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차분하게 다가온 그는 오도카니 앉은 제 아내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 낮게 불렀다.
  "레아."
  자카리는 레아가 살짝 고개를 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고, 뒤를 돌아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사박사박 걸음을 옮겨 여전히 앉아있는 그녀 곁에 다가갔다. 나풀거리는 옅은 머리칼, 새하얀 손, 저녁햇살 한 줄기 맺혀 있는 오똑한 코.
  그는 허리를 숙여 제 아내를 안아들었다.
  잠시 멈칫했던 팔이 이내 익숙한 몸짓으로 어깨를 붙잡았다. 자카리는 레아가 옅게 한숨을 쉬며 살짝 고개를 자신의 가슴팍에 묻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 따라 한숨을 쉬려다 간신히 그만두었다. 대신 느릿하게, 제 품에 안긴 레아가 어지러워하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가자."
  "……."
  "식사는 들어야지."
  "……자카리."
  그 부름에 그는 걸음을 옮기다 시선을 내렸다. 레아는 여전히 고개를 묻은 모습 그대로였다. 가는 목소리만 동굴 속에서 말하듯 웅웅거린다.
   "꽃봉오리가 맺혔더라."
  "응."
  "곧 필 것 같아. 벌써 두 번째야."
  "……그래."
  "빨리 피면 좋겠다."
  레아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 채도 낮은 하늘빛 눈이 향하는 곳을 그대로 따라간 자카리는 이내 그녀의 손을 볼 수 있었다. 붉은 노을빛 아래 또렷한 보라색 꽃잎을 잔뜩 쟁인 꽃봉오리 하나가 반지처럼 그녀의 소지를 동글게 묶고 있었다. 차마 피지 못한 망울.
  "피지도 않은 꽃은 왜 꺾고 그러냐."
  "글쎄……. 그냥, 이쪽이 어울려 보여서."
  레아는 푸스스 웃으며 제 왼손을 들어올려 쭉 펴 보았다. 작은 손이었다. 7년간 알로지아드 가도를 타고 온갖 곳을 가 본 사람의 손 치고는 제법 곧고 어여쁘다. 물론 이 손을 만들기까지는 잉그레 시녀들의 눈물 겨운 분투가 있었겠지만. 문득 그는 그 손등에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을 알았는지 햇살이 대신 그 위로 쏟아내렸다.
  어느새 두 사람은 잉그레 안으로 들어섰다. 레아는 나른하게 웃다가 평소 어조로 돌아와 말했다.
  "자카리, 나 내려줘."
  "……."
  "내려달라니까?"
  자카리는 아까 쉬지 못했던 한숨을 내쉬며 레아를 내려주었다. 그녀는 피식 웃고는 남편의 뺨에 짧게 키스하고 다시 경쾌하게 걸음을 옮겼다. 도무지 거칠 것 없는 걸음걸이라, 그 누구도 감히 사산한 아이의 묘에 다녀온 어미라 여기지 못할 것 같았다. 자카리는 묘한 표정으로 그런 레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레아."
  "왜?"
  "……."
  "왜냐니까."
  "……아니, 요새 살 쪘냐? 이전보다 좀 무겁……."
  레아는 옆 장식장 위에 놓여있는, 아직 매달지 않은 작은 태피스트리를 자카리에게 집어던졌다.
  "으악!"
  "무거우면 애초에 들지를 말던가!"
  "으…… 헉……. 장난 아닌…… 너 지금 진심으로 던졌지……."
  "난 언제나 당신한테 진심이야? 몰랐어?"
  뭐라 말도 못하고 맞은 자리를 움켜쥔 채 혀를 차는 자카리를 보며 레아는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새끼손까락에 매달린 꽃망울이 그 서슬에 봉긋 달아올랐다.
  잉그레에 봄이 무르익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