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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담벼락

오리우엘라 예거와 딤니팔 분단 썰 (1)


기본 등장인물:
딤니파 바에 사모스 라파 산테카를로
딤니파 바에 인수티 오리우엘라 산테카를로
(라 딤니파 바에 인수티 오리우엘라 사모스 라파 산테카를로: 발레다오스타 1세)
체사레 카아 빌라레알 얀 미라이예

잔루카 반살로 그로소 얀 미라이예
왕제王第 파비오 마레 카발리에 얀 무니시팔
(딤니파 마레 카발리에 파비오 산테카를로
라 딤니파 마레 카발리에 파비오 카모네 이보 산테카를로: 서 딤니팔 카모네라 1세)
바라이스 큘 일딘 노이레 도르프슈투벤




오리우엘라 예거와 딤니팔 분단 이야기를 풀 예정입니다. (개국은 잠시 미뤄두고요.) 반도 못 풀겠지만 그래도 엄청 길어질 것 같으니 복작복작한 타임라인이 탐탁치 않으신 분들은 잠시 블록 부탁드립니다!

197년 굴라르모 1세는 첫 아내를 잃고 바에 왕비와 혼인합니다. 새왕비는 199년, 남녀 쌍둥이를 출산하지요. 남자 아이는 딤니파 바에 사모스 라파 산테카를로, 여자 아이는 딤니파 바에 인수티 오리우엘라 산테카를로이고, 여자 아이가 남자 아이보다 반 시간 정도 늦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200년대부터 왕비는 왕의 무관심으로 바람을 피기 시작합니다.

라파(남)와 오리우엘라(여)는 어렸을 적부터 굉장히 친밀했습니다. 쌍둥이들이 흔히 그러하듯이요. 생각과 생각이 순간순간 교차할 정도로 정서적인 공감이 뛰어나고, 그런 만큼 서로를 서로가 가장 잘 알지요. 그러나 희한하게도 그 둘의 성격은 그다지 같지 않습니다. 오리우엘라가 엄청나게 차가움-엄청나게 뜨거움을 오가는 다혈질이라면 라파는 조금 무르거든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다만 하호하는 호인 느낌이라 해야 하나요. 왕자는 몸 쓰는 것에도 별 재주가 없습니다만, 교양과 학식이 무척 뛰어나요. 반면에 오리우엘라는 문화나 교양 쪽에 일자무식이랍니다. 농담 아니고 한 자도 몰라요. 그러나 전략, 전술, 모략, 검술에는 탁월한 실력을 보이지요. 이처럼 둘은 차이가 참 극명했습니다. 물론 이 차이 때문에 둘이 더 친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해서 취향까지 닮는 건 아니라서, 라파-오리우엘라를 제한 그 둘의 친구에는 교집합이 없었습니다. 라파는 학문적 소양이 뛰어난 왕실 종친이나 학자, 고관들과(십이공회) 어울렸던 반면 오리우엘라의 친우들은 죄다 기사부터 기사였거든요. 예컨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 체사레는 왕국 최고의 기사로 정평이 나 있답니다.

이 체사레는 미라이예의 차남입니다. 첫 번째 공비는 장남을 낳고 산욕열로 사망했습니다. 
체사레는 공작이 일 년 만에 다시 맞은 두 번째 공비 소생이지요. 형인 잔루카와는 네 살 차이. 그가 어렸을 때 쌍둥이와 만난 적은, 그들이 태어나자마자 예를 표한 것 - 당시 체사레는 열 살 - 딱 이것뿐이랍니다. 이 예를 치르자마자 체사레는 미라이예 영지로 내려가서 열넷까지 통치하는 법을 배우고, 전통대로 꽉 찬 열네살에 종기사로 출전합니다. 그리고 삼 년 간 열심히 열심히 살인에 능숙해져 열일곱 살이 될 즈음 왕도로 돌아오지요. 

각설하고, 왕은 업무에, 왕비는 남자에 중독되어 쌍둥이들은 방임되어 컸습니다. 라파는 태자이므로 잉그레 바깥으로 거의 못 나갔지만, 여자인 오리우엘라는 그보다 만 배는 더 자유로웠어요. 애초에 그녀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해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정말 많이 딤니팔을 돌아다닙니다. 오리우엘라는 일곱 살 때 벼르고 벼르다 말로만 듣던 알론조 캄비로 떠납니다. 일곱 살짜리 애가 그런 자연의 경이를 보고 좋아하면 얼마나 좋아하겠어 다들 이렇게 생각하는데, 의외로 오리우엘라는 그곳을 사랑하게 됩니다. 또래보다 머리가 굵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마 민감한 직감 탓 거에요, 아마. 그곳이 주는 경외감을 누구보다 잘 느꼈을 아이니까요.

하루는 아이가 오밤 중 신전 앞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여기는 캄비 사제들의 수호 아래 있으므로 위험한 것이 있을 확률이 영에 수렴합니다. 대륙의 눈인데요, 뭐. 아무튼 그래서 유모도 일단 다녀오시라 내버려 두지요. 엄청나게, 엄청나게 큰, 바다 같은 밤 호수. 오리우엘라는 압도당합니다. 어린 나이, 자연에 지루해하기가 쉬운 만큼 한 순간 경도되기도 쉽지요. 그녀는 호숫가로 다가가 손을 찰박찰박 담궈 봅니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것이 아닌듯 엄청나게 차요. 그녀는 신발을 벗고 발을 담궈 봅니다. 뼛속까지 냉기가 치미며 기분이 좋아지죠. 그녀는 한 발자국 더 들어갑니다. 두 발자국 들어갑니다. 세 발자국. 네 발자국. 어린 아이들이 흔히 그러듯 한 가지에 몰두해 헤어나올 줄 모르는 모양이에요.

그리고 한 순간 물 속에 푹. 오리우엘라는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습니다. 사지를 버둥거리지도, 눈을 꽉 감지도, 입을 열지도 않아요. 다만 멍하니 앞을 응시합니다. 그녀는 그 순간 무언가, 이 찬 물 속에 명멸하는 빛을 보지요. 북부의 새하얀 백야와 같은 것. 오리우엘라는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 눈물나게 아름다운 것에 정신을 빼앗깁니다. 그러다 숨이 점점 막히고, 미쳤는지 웃다가 뽀골뽀골 물도 드시죠. 그런데 여전히 사지는 움직일 생각을 안 해요. 희한하지요. 눈은 빳빳히 뜬 채로, 의식은 점점 멀어지는데. 

다음 순간, 누군가가 그녀를 번쩍 들어올립니다. 물에서 공기 중으로 확 드러나요. 오리우엘라는 물을 웩 토하고 기침을 여러 번 하다가, 다시 물 속에 들어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녀를 쥔 남자 손이 너무 세서 그녀는 어떻게 물에 발끝조차 댈 수 없었습니다. 남자는 그대로 그녀를 뭍까지 끌고 나와요. 그는 허리 위론 하나도 안 젖었을 만큼의 깊이었지요. 

오리우엘라는 땅에 발을 대자마자, 몸도 안 돌리고는 자기를 왜 건지냐고 벌컥 화를 냅니다. 남자는 그럼 내가 널 죽게 내버려 두냐고 말합니다. '나는 아래에서 볼 게 있었어!' '네 죽음?' 그녀는 그에게 입 닥치고 꺼지라 하지요. '몇 살이지? 어디서 안하무인 욕설인가?' 오리우엘라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기로 합니다. 그녀는 물 쪽으로 걸어가려다 다시 남자에게 꽉 붙들려요. '들어가.' '넌 말이나 똑바로 해라. 어디에 감히?' (그녀가 좀 성숙한 단어들을 쓰는 건 주변에서 들은 것이 그런 단어들밖에 없어서에요.) 남자는 그래서 네가 누구기에 하고 묻습니다. 오리우엘라는 당당하게 본명을 밝히지요. 딤니파 바에 인수티 오리우엘라 산테카를로. 

남자는 잠깐 조용히 있다가 곧 한 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작은 손등에 입을 맞춥니다. 느릿느릿 일어서며 말하지요. '전하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것은 들어 알았으나 미처 존안을 몰라 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사과를 받고, 반대로 이름을 묻습니다. 거만하게. 그는 대답합니다. 체사레 카아 빌라레알 얀 미라이예. 이제 오리우엘라가 당황할 차례지요. '미라이예? 공작의......?' '차남입니다. 기사직 수행을 마치고 왕도로 돌아가는 도중 잠시 알론조 캄비에 거처를 정했습니다.' 체사레는 '전하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알고도 뵈러 가지 않은 것'까지 사과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캄비가 개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해주는(물론 그만큼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지만) 일종의 격리된 휴양처 같은 곳이기 때문이에요. 

오리우엘라는 얼떨떨하게 이 우연을 인정하고, 알겠으니 들어가라 하지요. 그녀는 사실 여전히 저 아래의 빛이 급했습니다. 오리우엘라는 어둠 속 그의 얼굴을 한 번 제대로 보지 않은 채 다시 몸을 돌립니다. 그 자리에 못 박힌듯 서서 망망대해 같은 호수를 바라보지요. '전하.' '가져야겠어.' '예?' '가져야 해.' 오리우엘라는 그 조막만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쌉니다. 체사레는 아이가 아픈가 해서 그녀 앞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주저앉아서, 거의 처음으로 아이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요. 그녀는 기묘하게도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습니다. 무서울 정도로요. 기이한, 푸른 안광. '전하. 들어가시지요.' '저건 내 것인데.' '예?'

그녀는 그제야 눈을 아래로 돌립니다. 그제야 체사레가 보였어요. 검은 머리, 녹안, 눈매도 턱선도 콧날도 전부 날카로운 선으로 만든 것 같은 소년입니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깐 고요했다가, 끝내 눈을 피하지 않고 말합니다. '들어가시지요.' 침묵. 일곱 살의 오리우엘라는 열일곱의 체사레를 스쳐지나갑니다. 호수 방면으로요. 그는 그녀가 다시 한 번 물에 빠질까 걱정이 되어 뒤를 돕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지요. 오리우엘라는 아주 얕은 곳에 서서 고개를 숙여, 얼굴을 물에 담굽니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빛나는 구체가 잡혀요. 그러나 가까운듯 하면서 멀고, 먼듯 하면서 가깝지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체사레를 돌아 봅니다. '이리 와.' 그는 그렇게 합니다. '물 속을 봐 봐.' 그는 그렇게 합니다. 그에게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아한 상태로 흠뻑 젖은 얼굴을 들지요. '빛이 보여?' '아니오. 어둠뿐입니다.' 오리우엘라는 다시 한 번 확인하라고 칭얼대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나온 건물 쪽을 바라보고 자신이 선 쪽을 내려다 볼 뿐입니다. 체사레는 그녀가 제 위치를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오리우엘라는 눈대중을 끝낸 뒤 인사도 없이 신전 쪽으로 걸어갑니다. 체사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작은 그림자를 지켜보고, 그것이 사라지자 역시 따라 들어가지요. 

다음날 오리우엘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자, 바깥에는 좀 멍한 듯한 체사레가 앉아 있었어요. 그녀는 어디서 본 사람인데 하다가 그가 어젯밤에 자기를 잡았던 소년이란 사실을 깨닫지요. 오리우엘라는 의외로 그에게 선뜻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합니다. 체사레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요.... 이게 기이인 그들의 첫만남입니다. 체사레는 오리우엘라 옆에 붙어선, 알론조 캄비부터 잉그레까지 동행하지요. 오리우엘라는 그 여행길 동안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물론 인격적으로요. 일곱 살과 열일곱인데... 그쵸... 아무튼 잉그레에 둘이 함께 돌아오자 놀란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우선 그녀의 분신과도 같은 라파가 식겁하죠. '누구랑 왔다며?' '미라이예.' '경은 여기 있는데?' '둘째래.' '어디서 만난 거야?'

오리우엘라는 시시콜콜 물어대는 그를 한 대 치고는 평소처럼 잉그레 연병장에 놀러 갑니다. 그런데 거기서 여러 사람들이 하나를 둘러싸고 웅성웅성거리는 것을 봐요. 뭐야 뭐야 하면서 헤치고 들어가니까 어라, 안에 해멀건한 체사레가 앉아있네요. 조막만한 여자애가 시커먼 남자들을 헤치고 들어온 건 사실 잘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래서 몇 마디 듣기도 전('경. 아직 어린 전하와 함부로 동행하면 안되지.')에 누군가에게 깔릴 뻔해요. 그 순간 체사레가 오리우엘라의 양 어깻죽지를 안아 올립니다. 그녀는 어 하는 순간 그의 무릎 위에 앉게 돼요. 체사레는 전하께서 계시니 거동을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는 요지의 말을 하고, 자신들이 어린 왕녀를 누를 뻔했다는 사실에 놀란 기사들이 약간 산란하게 파하는 동안 계속해서 그녀를 안아들고 있습니다.

오리우엘라는 이미 많이 친해진 체사레와 웃으며 이야기합니다. '저 사람들이 뭐래?' '제가 어린 전하께 흑심을 품었다 하더군요.' '경은 그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녀는 의아한 채로 뜻을 묻지만 그는 계속 침묵하다가 휙하고 화제를 돌립니다. 나중에 라파가 쫓아와서 체사레에게 무려 여동생한테 접근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습니다만 그 여동생한테 얻어맞고 끝나지요. 아무튼 체사레와 그녀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해서, 그가 그녀에게 심심풀이로 자기가 배운 전략 전술 등을 가르쳐주고, 검도 가르쳐주고, 이 정도로 친해지지요. 일반적인 왕녀와 기사 사이보다는 좀 많이 친해요. 이것은 체사레의 형인 잔루카, 그리고 라파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양쪽으로 자제해라 난리난리를 피워도 둘은 끄떡 없어요.

라파는 오리우엘라가 그와 친해져 조금 비게 된 자신의 공간을 다른 친구들에게로 돌리기로 결심합니다.(물론 여전히 라파와 오리우엘라는 누구보다도 - 당연하지만, 체사레보다도 - 더 친합니다만, '비교적'이요.) 그런 그가 시선을 돌린 쪽이 무니시팔 형제였습니다. 라파의 아버지, 즉 굴라르모 1세의 형제의 자식들이요. 이쪽은 독립해서 무니시팔 후작가로 내려갔거든요. 아무튼 이 형제들 역시 아이와 놀아주는 기분으로 태자와 잘 지냅니다. 오리우엘라는 계속 평소처럼 연병장에서 놀고, 먹고, 떠들고, 기사들에게 귀염 받으며 크고요. 

그러다 세월은 지나고 지나서 오리우엘라는 열넷이 됩니다. 체사레는 스물넷이고요. 딤니팔의 남성 귀족이 열넷에 출전한다면 여성 귀족은 열넷에 사교계에 데뷔하지요. 속은 점점 현실에 찌들어 각박하고 잔인해지지만, 어쨌든 겉만은 오리우엘라도 슬슬 피어가는 시기에요. 그런데 이런 그녀를 누가 에스코트할 것이냐에 대해서 소리 없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녀를 어여삐 여기는 기사들은 물론 너무 강력한 적이 있어 물러나야 했지만... 그 적 역시 홀로 독보적인 것은 아니었거든요. 체사레 역시 라파라는 신분으로는 가히 최고인 라이벌이 있잖습니까? 지금까지 오리우엘라에 대해서 그냥저냥 내가 가르치는 아이 정도의 거리를 보여주던 체사레는 이번에 정말 의외로, 진짜 의외로, 오리우엘라를 자기가 에스코트하겠다고 오금을 박습니다. 그녀는 답지 않은 강조에 뭐야 하는 눈초리를 보내지만 딱히 안된다 불허하지는 않아요.

이에 라파가 펄쩍 뜁니다. 원래가 온화한 라파라도 제 쌍둥이에 대해선 서로가 서로에게 어느 정도 지분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건 오리우엘라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그녀도 겸허히 인정해요. 만일 라파에게 자신의 체사레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자기는 아예 잉그레를 뒤집어 엎었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러나 그렇다고 어느 한쪽 편을 들어주기는 싫습니다. 그녀는 니들끼리 알아서 해라 하고 칼이나 잡으러 가죠. 아이고. 라파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체사레에게로 갑니다. 가서 말하죠. 

'경. 지금까지는 참았소. 이번에 경은 드디어 정도를 넘었소.' '용건을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오리우엘라의 에스코트는 내가 맡소. 우리는 한 날 한 시에 태어났고, 서로에게 그 정도의 의미는 되오.' '저는 전하를 아낍니다.' '그뿐이오?' '아니오. 그분은 제가 가장 귀히 여기는 벗입니다.' '나는 이해가 안 가. 도대체 일곱 살의 무얼 보고 그때부터 주욱 그녀를 돌보는 거요? 도대체 무엇을 욕심내서? 혹 부마가 되기를 원하오?' '아니오. 저는 그것이 가장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무슨 마지막?' 체사레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말을 돌리는 데 있어선 기분 나쁠 정도로 뻔뻔해요. '좌우간 전하의 에스코트는 제가 맡을 예정입니다. 전하께서 수락하셨습니다.' '무슨 소리요? 오리우엘라는 알아서 해결하라던데.' '그것은 오리우엘라 전하께서 제 앞에 선 분이 제게 설득당할 줄 아셨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전하를 설득할 수 있습니다.' '뭐요?' '제가 안 하면 이순위는 라파 전하가 아닙니다.' 라파는 당황하지요. '무슨!' '이순위는 저희 형님이십니다. 폐하께서는 오리우엘라 전하를 미라이예에 출가시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따라서 저라면 어떻게든 얼마 전 작위를 승계 받으신 형님과도 퉁칠 수 있지만, 전하께선 아닙니다.' 물론 거짓말입니다. '도대체-' '허락해 주십시오.' 라파는 고민하다가, 공작보단 차라리 오리우엘라와 오래 알았던 체사레가 나을 것 같아 허락합니다. (나중에 자기가 속은 것을 알고는 길길이 날뜁니다만.)

체사레는 그처럼 가뿐히 왕자의 수락을 맡고는 꽉 찬 열넷의 그녀를 에스코트합니다. 오리우엘라는 물론 끝나고 볼 전술 전략 책들과 검에 온 정신이 팔린 상태입니다만. 아무튼 체사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왕녀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확인시켜 줍니다. 오리우엘라는 노련한 검사(!)답게 춤도 잘 추고, 기품도 잘 지키고, 말도 사납게 하고 첫 데뷔를 끝냅니다. 체사레는 무도회에서 날밤을 꼴딱 새고도 멀쩡하기 짝이 없는 오리우엘라를 억지로 곁방에 밀어넣습니다. 그녀는 팔팔한 채로 들어가서 드디어 단 둘만 남자, 체사레를 붙들고 저가 낮에 읽었던 개국 전쟁의 몇몇 전술에 대해 열성적으로 묻지요. 체사레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멍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전부 들어주고는, 그녀가 전술에 대해 질문하자 대뜸 반문합니다. '전하께서 그것을 궁금해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오리우엘라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는, '경이 신경쓸 바 아니다. 답이나 해.' '후일 유용할 일이 없으실 겁니다.' '무슨 상관인가. 답이나 하라니까. 안 하면 한 대 친다?' '왕계를 돌이킬 생각이 있으십니까?' 순간, 오리우엘라는 체사레를 무섭게 노려봅니다. 그가 지금까지 이런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놀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의 주제넘음에 분노해요.

오리우엘라는 자리를 박차고 나옵니다. 그녀는 그 뒤로 체사레를 만나지 않습니다. 그가 싫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계속 그와 만나면 첫째, 그에게 자신이 그 말에 호의적이라는 인상을 주게 되고, 둘째, 그의 말에 쉽게 휘둘리는 자신이 뇌리에 단단히 박혀버리거든요. 물론 아예 안 만나는 건 아닙니다. 그와의 일정은 항상 소화해내요. 오리우엘라는 이미 그의 검술이 손에 너무 익어서 다른 스승으로 바꿀 수가 없었고, 전략이나 전술 스승도 교체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거든요. 그러나 오로지 그뿐, 그녀는 이전처럼 잡담을 하거나 자신의 여러 사소한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둥 친밀하게 굴지 않습니다. 배우기만 해요, 딱 배우기만. 체사레는 섭섭하다는 감정을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건 느끼지도 않은 것 같아요. 그는 그처럼 무덤덤하게 한 해 정도를 더 가르치고는, 말도 없이 씽 전장으로 떠나버립니다.

오리우엘라는 말은 안했지만 깊이 상심합니다. 열다섯. 그녀는 이전보다 더욱 심한 벽을 쌓습니다. 오로지 체사레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그냥 자라면서 점차 그게 자기 성격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거에요. 제 아래로 복종시킬 때가 너무 좋아요. 온갖 성질머리를 부려도 실력 하나면 끝내 제 아래 고개를 숙여야 하는 이 세상 시스템이 마음에 들었고, 그에 가장 적합하게 진화하는 거죠. 희한하게도, 오리우엘라의 성정이 칼같아 질수록 그녀에게 매료되는 이도 많아집니다. 딱부러지고 카리스마 있는 수재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 주나봐요. 라파는 사실 언제고 그녀와 부대끼는 처지라서 그녀가 좀 변한 것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한 순간 옛날을 돌이켜보고 어라 내 누이가 좀 변하긴 했군 이 정도의 감상을 보일 뿐이지요. 외려 라파와는 예전보다 사이가 더 좋아졌습니다. 체사레가 없어졌거든요. 라파 역시 무니시팔 형제들과 좀 멀어져서 오리우엘라와만 함께합니다. 그리고......... 예. 대망의 열여섯이지요.

215년 11월 굴라르모 1세가 승하합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215년 11월 1차 바에 논쟁이 터지지요. 십이공회를 필두로 웬만한 귀족들이 왕비의 부정을 들고 일어납니다. 쌍둥이를 낳고 난 뒤 열다섯 해 가량 그녀를 지나간 유명한 남자들은 사실 지금 이 순간에 이르러선 세는 것도 의미가 없어졌거든요. 너무 많아서. 그들은 핏줄이 의심되니 쌍둥이에게 왕위 승계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논쟁을 제기한 자들의 본심은 당연히 다르고요. 그들은 명민한 라파가 선왕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굴라르모 1세는 부지런한 왕권신봉자라서 그 전까지는 6:4, 7:3(전자가 왕권) 정도로 균형을 맞추고 있던 권력분배를 단숨에 9:1 정도까지 밀어버렸거든요. 어어 하는 사이에 밀린 거에요. 일을 너무 잘하니 어떻게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고 그냥 벙어리 냉가슴 앓듯 삼십년을 기다려 온 거지요. 귀족들은 현상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게 논쟁이 좀 커져서 당연히 라파가 물려받아야 할 왕관이 좀처럼 십이공회에서 통과되지 않아요.(딤니팔이 지금과 얼마나 다른 권력구조를 보여주는지 보이시죠?) 라파와 오리우엘라 쪽은 이를 악물고 참는 중입니다. 언제까지 저토록 지리한 욕심들을 터뜨리는지 보자.

그리고 해가 넘어갑니다. 216년 제2차 바에 논쟁이 발발합니다. 선왕제의 아들이 계승권을 주장, 누가 더 적통인지 가리자는 뻔한 치킨게임이 시작된 거죠. 여기서 라파가 진짜 지독한 배신감을 느낍니다. 왕관을 먹겠다고 튀어나온 인재가 자신이 어릴 적 함께했던 무니시팔 형제였거든요.(굴라르모 1세의 죽은 형제의 아들 둘입니다.) 오리우엘라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늪 속에 숨은 아귀처럼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시퍼런 분노를 갈면서요. 자기들이 얼마나 우스이 여겨지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거지요. 그녀는 이 순간 느꼈던 치욕감을 평생토록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녀의 마지막 인내를 끊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무명이 쌍둥이 쪽 손을 들어준 거에요! 라파는 이 사실에 만족했지만, 오리우엘라는 마지막 제방이 터져서 제 남매에게 미친 듯한 화를 퍼부어댑니다. 감히 무명따위가, 기껏해야 왕의 파수꾼, 왕의 정보꾼 노릇이나 하는 무명이 어디다 대고 왕계를 평가하냐고요. 그런데 무명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 이처럼 선언했죠. 왕비가 본격적으로 타락한 때는 쌍둥이를 놓고 난 뒤였다는 것. 그러나 그 뒤의 사태가 너무 심각했으므로 우리는 누구에게도 본격적인 도움은 주지 '않기로' 판단함.

이에 오리우엘라가 대외적으로도 폭발합니다. 그녀는 큰 분노를 못 느끼는 라파를 옆 의자에 밀어두고, 눌라레의 원탁 앞에서 온갖 원색적인 욕설을 해가며 노신들과 어머니의 부정에 대해 논하지요. 여기서 오리우엘라는 내 어머니의 남자가 많았다는 것과 내가 왕의 딸이라는 것에 어떤 관련이라도 있나? 아버지의 무관심 때문이라는 인과관계가 이처럼 뚜렷한데, 따지고 보면 아버지야말로 아기 주머니로 어머니를 이용한 뒤 버린 것 아닌가? 이런 식으로, 그러나 이보다는 만 배 더 사납고 악독하게 독설을 내뱉습니다. 문제라면 그 자리에 청문회의 대상인 대비, 즉 쌍둥이의 어머니도 계셨다는 거지요. 그 자리에 있던 대비는 그 독설에 놀라 새하얗게 질려 기절합니다.

오리우엘라는 그 광경에 신경도 안 씁니다. 그녀는 어머니를 위로 모셔두라 해 두고는 계속해서 대신들을 윽박질러요. 라파는 그 광경에 질려 어머니와 함께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는 왕비가 정신을 차리고, 이만 가 보라기에 네 하고 다시 눌라레의 원탁으로 내려와요. 오리우엘라는 미라이예 공작과 목에 핏대가 오르도록 싸우는 중이었어요. 

라파는 머리를 짚으며 다시 자리에 앉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무니시팔을 옹립하니 어쩌니 해도 자신이 보기에 귀족들의 목적은 뻔합니다. 선대왕의 왕권 중심 정책 기조를 좀 바꾸라는 거지요. 그 사실에 있어서 자기가 조금만 양보하면 무니시팔 이야기는 곧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물론 오리우엘라는 그에 치를 떨 사람이지만요. 그녀는 여전히 미라이예 공작과 싸우고 있습니다. 공작이 직접적으로 근거를 하나하나 대며 넌 왕의 핏줄이 아니다 비슷하게 말하니 라파는 순간 기가 막혀 헛 하고 웃지요. 오리우엘라는 그 몰염치에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녀는 그 말도 안되는 궤변을 하나하나 반박해 준 뒤, 말 그대로 진짜 폭언을 내쏟습니다. 네 놈의 동생이나 본받아라. 저토록 성질머리가 사납고 머리가 모지리니 네 어미까지 널 견디지 못하고 죽었지.(미라이예 공작의 어머니는 산욕열로 죽었습니다.) 이에 당연하지만 공작 역시 폭발합니다. '당장 그 말을-' '내가 취소해야 하나? 내가 왜? 지금 왕의 적법한 딸에게 노여움을 보이는 건가? 네 놈의 아버지들이 왕가에 가졌던 공경심은 전부 시궁창에 쳐박았나? 졸렬하기 이를 데 없는 자로다. 네 놈은-' 그러는 순간 누군가 헐레벌떡 들어옵니다. 

오리우엘라는 죽일 기세로 말을 끊은 시종을 쏘아 보지요. 그런데 그 시종이 전한 소식은, 대비가 자결했다는 내용입니다. 오리우엘라의 표정은 변함이 없어요. 자기 친딸에게마저 그런 말을 듣는 대비 자신이 역겹고 처량해, 순간적으로 욱한 자살인 게 아주 뻔한데도요. 당연하지만 그 소식이 들어오자 원탁은 폭풍 맞은듯 전부 넋이 나갑니다. 라파도 즉각 얼굴이 새하얘져 눌라레의 방을 나서지요. 오리우엘라는 잠깐 가만히 있다가, '공회는 이만 파하오.' 사람들은 엉거주춤 어떻게 해야 하나 완전히, 총체적인 혼란 상태입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원탁 바깥으로 몰아내고, 잉그레에서 떠나는 모양까지 전부 확인하지요. 그리고 국장을 선포한 뒤 잉그레를 봉쇄합니다.

그녀는 자결한 어머니의 얼굴을 보러 가지 않습니다. 이로써 평생 처음으로 라파와 대판 싸워요. 물론 라파만 열을 내고, 그녀는 창 밖을 보며 가만히 듣고 있었지만. 오리우엘라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서 라파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머리가 똑똑한 건 알겠어요. 그런데 그 똑똑한 머리는 전부 지금 이 상태, 지금 이 안위를 지키는 데 쓰입니다. 진취와 발전 등등의 가치는 그에게 아무 쓸모가 없어요. 오리우엘라는 이 사실에 거의 절망적인 슬픔을 느낍니다. 그녀는 이번 사태가 끝날 때까지 그를 제 뒤로 밀어두기로 결심하지요.

그리고... 왕비의 자결로 잉그레가 봉쇄된 한 달. 그 끄트머리에, 선왕제의 형제와 지지자들 간의 충성 맹세가 이루어집니다. 십이공회에서 정확히 절반이 무너져 무니시팔 쪽으로 넘어갑니다. 미라이예를 포함해서요. 이로써 쌍둥이 쪽에 남은 십이공회는 자멘테, 톨레도, 그나시오, 페로타, 델피에로, 키에아뿐입니다.

일단 무니시팔 쪽에는 미라이예가 있습니다. 이건 가히 어마어마한 전력이지요. 그나마 라파/오리우엘라 쪽에 왕국의 혈관인 톨레도, 동부 대영주 자멘테(이때는 동부의 영주였습니다!), 역시 동남부, 캄비를 가로지르는 대영지의 주인 그나시오가 있어서 겨우 동치를 이룰 수 있던 거지요. 아무튼 무니시팔 충성 맹세가 이루어지자 소귀족들도 대거 양편에 합류하기 시작합니다. 오리우엘라는 이를 갈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딤니팔이 벌이고 있던 모든 전쟁은 중단되고,(귀족들이 사병을 도시락마냥 싸들고 가니) 그녀는 체사레 역시 북부에서 물러나 미라이예 공작 쪽에 합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리우엘라는 약간의 배반감을 느꼈다가, 그런 자신에게 더욱 놀라고 맙니다. 미라이예가 미라이예에 합류하는 게 뭐 어떻다고 자신이 그를 책할 권리가 생기는지요. 그녀는 그런 자신을 꽉 짓눌러버립니다. 그리고 내전을 준비하지요. 그녀의 최대 전술 참모는 그나시오 백작이었고, 내정은 라파와 톨레도 백작, 외정은 라파와 자멘테 후작 담당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략은, 그녀 혼자 짰어요. 전술이 전투 개개에서 이기는 방법이라면 전략은 그 전투를 성립하게 만들고 이길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주는 가장 기본적인 맵이지요.

오리우엘라는 그 누구보다 그 방면에 뛰어나서, 제대로 땅따먹기가 시작되기 전에 여러 주인 있는 땅들을 잡아먹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초반 고지를 차지한 뒤,(217) 협상을 하려 손을 뻗는데, 그제야 미라이예가 일어섭니다. 그때까진 자기들 영지를 하나로 꽉 묶느라 잔루카고 체사레고 일에 여념이 없었거든요. 그 넓다란 재산과 영지의 일원화가 끝나자 비로소 내전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라파/오리우엘라는 이에 화력의 차이를 절실하게 느낍니다. 나온 만큼 밀리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어요. 게다가 체사레가 총사, 그나시오가 총사를 맡은 칼치오 회전에서 대패. 금세 세력권은 동부로 줄어들게 되었지요. 원래 중부 자체가 미라이예의 앞마당이기도 하니까요, 뭐... 그나마 동부와 알론조 캄비, 오스페다를 수호할 수 있었던 건 톨레도의 알로지아드 가도와, 오리우엘라의 가히 천재적이고 절박한 돌려찌르기 전술 덕분이에요. 

그녀는 날이 가면 갈수록 사선 위에 서 있는듯 날카로워집니다. 귀족들이야 다들 명망이 있고 하니 세력은 축소당할지언정 축출당하지는 않을 텐데, 자신과 라파에게는 얄짤이 없을 것을 잘 알거든요. 라파 역시 이 사실을 압니다. 그는 끝내 자기는 외국을 상대로 외교술을 잘 펼치고 있는데 너는 내전에서 실패하길 그 모양이냐고 화를 냅니다. 사실 그 둘이 각자 상대하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되는 비교지만, 그리고 오리우엘라도 그 사실을 알지만, 그녀는 그저 잠자코 그의 비난을 듣습니다.

라파는 이제 모든 것을 그녀의 탓으로 돌립니다. 어머니를 죽게 한 것도 오리우엘라의 죄이며, 그녀를 자살하도록 둠으로써 자기와 약간 반대편에 있던 귀족들을 단박에 절벽 끝으로 밀어버렸다고요. 그리고 폭언으로 귀족들의 비위를 거슬리게 했으며 심지어 미라이예에게마저 예를 차릴 줄 모르던 얼간이라고 욕설을 퍼붓지요. 라파는 더불어, 차라리 그때 잔루카가 너를 아내로 들이고 싶어했는데 몸을 팔아서라도 이 사태는 막았어야 하지 않느냐고 나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가서 창녀질을 하라고요. 오리우엘라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싸울 일에 마음이 너무 바쁘거든요. 라파가 아무리 패배주의적인 발상에 푹 빠져 있어도 그녀는 아닙니다. 오리우엘라는 언제고 아래보다는 위를 보았고, 뒤보다는 앞을 보았고, 부분보다는 전체를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이번의 대패도 승리를 위한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다 생각했어요. 필시 그렇게 되리라고요.

그러나 라파는 아니지요. 그는 자신에게 미안하다 하지도 않고, 절망에 눈물 흘리지도 않고 다만 내일의 싸움을 준비하는 오리우엘라에게 진저리를 쳐요. 어차피 끝에 보이는 것이 답없는 패배인데 그런 말도 안되는 낙관주의는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냐고 화를 내지요. 그녀는 계속해서 고개만 끄덕이며 전술을 생각하다가, 라파에게 뺨을 맞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쌍둥이 남매에게 맞은 거에요. 오리우엘라는 조금 놀랍니다. 그러나 그를 놓은지 오래이기 때문에,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맞은 뺨을 한 번 어루만지지도 않은 채 뒤돌아 쌩 나가버립니다. 지나친 고독이 서럽지도 않아요. 너무 바짝 말랐어요. 그녀는 다음 전투에서 이깁니다. 그러자 라파는 또 한동안 잠잠해져요.

오리우엘라는 이런 날들(217~218)동안 하루에 네 시간을 자면 정말 많이 자는 생활을 영위해 갑니다. 잉그레의 가장 큰 적은 아무래도 미라이예였어요. 특히 그중에서도 체사레. 잔루카는 이제 완전히 동생을 신뢰하기 시작한 듯 했습니다. 평화의 시기에는 우선 어머니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이것저것 견제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 체사레의 능력이 활짝 날개를 펼 때가 되자, 그리고 그런 엄청난 능력자가 오로지 제 형님에게만 복종하자 이제 긴장을 놓은 것이지요. 사실 잔루카가 긴장할 필요가 없기도 했습니다. 오리우엘라가 이긴 전투에 체사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패배한 전투는 전부 체사레가 지휘한 것이었거든요. 무니시팔 형제도 초반에는 체사레가 예전에 보여주었던 오리우엘라에 대한 충정을 기억해 잔뜩 경계했다가, 218년에 이르러선 누구보다도 더한 충신으로 여기지요.

오리우엘라는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그를 잉그레의 주적으로 설정하지만 애초에 사적인 감정을 배제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합니다. 그녀에게는 이제 사적인 생활과 사적인 감정이 전혀 없거든요. 오리우엘라에게는 그녀가 가진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도, 조금이나마 기댈 수 있는 사람도,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도,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이제 정말 그녀뿐이었어요. 라파는 언제고 잔뜩 곤두선 괭이새끼 같고요. 이제 그는 내정 외정에서도 도움이 안됩니다. 그는 한 번 지면 오리우엘라를 미친듯이 닦달합니다. 내 목이 잘리는 것을 보고 싶냐고 화를 내지요. 그럴 때면 그녀는 항상 조용히 정말 조용히 그의 모든 화를 받아줍니다. 그녀는 절대 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그녀는 라파를 제한 모든 사람에게 성질이 사납기로 유명하지요. 그러나 단 한 사람, 라파에게만 자신을 참는 겁니다. 같은 영혼과 같은 핏줄에서 갈라져 나왔으니까요. 그를 위해 이기자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만,(그녀의 승리에 대한 인식은 당위에 가깝습니다. '이겨야 한다.') 그를 위해서 지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요. 이런 익숙치 않은 보호자 의식은 오리우엘라를 점차 정서적으로 메마르게 만듭니다. 물론 이 이전이라고 그녀가 여유로웠다는 건 아니지만, 이제 드디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웃지도 울지도 않고 승리를 일구기 위해 일하는 무정물 느낌이 된 거에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기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오리우엘라도 인정해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지금 가진 땅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아니오. 지키면 다행이지요. 오스페다, 알론조 캄비를 둘러싼 부분만 수호할 수 있는 게 제 최선인 듯 해요.(그래도 물론 웬만한 중소국 너덧개는 되지만요.) 라파도 거의 동시에 그 사실을 눈치챕니다. 오리우엘라는 그가 또 언제 폭발할까 기다립니다. 그러나 의외로, 폭발하지 않아요.

그녀는 219년 말까지 점차 줄어드는 땅에서 이 악물고 버팁니다. 모든 것이 모자라요. 그래도 버텨요. 버텨요. 버텨요. 그리고 220년 2월, 오리우엘라는 라프테냐 전투에서 대패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죽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자기 사람들, 자기 귀족들도 죽지는 않을 테니 상관없습니다. 다만 라파. 오리우엘라는 라파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정서적으로 완전히 몰립니다. 그처럼 패배를 '직접' 당하고, 라파의 반응을 두려워하며 잉그레로 돌아갔는데, 의외로 라파가 웃으며 자신을 반겨줍니다. 오리우엘라는 경계합니다. 그리고 웃는 라파를 경계해야 하는 자신에게 정말 미칠듯한 자괴감을 느낍니다. 웃는 라파가 말하죠. '무니시팔에게서 연락이 왔어.'

그녀는 답합니다. '...무슨?' '지금 투항하면 날 동부 영주로 임명해 준다네. 유폐하는 것 정도로 봐 주겠대.' 오리우엘라는 그를 빤히 바라봅니다. 자신의 칼에는 아직 사람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저 사람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물론 너도 함께야. 다행히도, 너는 누구에게 강제로 시집을 가거나 할 필요는 없대. 그냥 나와 같이 떠나면 된다는군. 그렇게 하자.' 그녀는 그를 멍하니 바라봅니다. '너도 지금 우리 상황이 목이 날아가기 일보 직전이라는 사실 정도는 잘 알잖아. 난 죽기 싫다.' 그녀는 여전히 입을 약간 벌린 채로 투항을 이야기하는 라파를 바라봅니다. 라파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쇼파에서 일어서 오리우엘라에게로 다가옵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그가 본디 가진 여유로운 미소입니다. 죽음에서 벗어난. '그렇게 하자. 응?' '.......' '그런 줄 알고, 그러면 아직 남아 있는 밀사한테 연락해둘게. 알았지?' 라파는 그녀를 한 번 안아주고는, 뒤를 돕니다.

오리우엘라의 칼에는 세 자루가 있습니다. 하나는 항상 쓰는 군용 검. 하나는 자잘한 용도에 쓰고, 매번 갈아치우는 단검, 그리고 그 중간 정도의 길이로, 잉그레에서 만들어진 중검. 그녀는 중검의 칼자루에 손을 올립니다. '라파?' 라파는 뒤를 돌아봅니다. 오리우엘라는 칼을 뽑는 것과 동시에 그를 베어넘깁니다. 피가 분수처럼 솟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도 묻습니다. 21년이었어요. 오리우엘라는 피가 푹 솟기에 그대로 동맥을 벤 줄 알았습니다만, 의외로 라파는 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그에게 다가갑니다. 숨소리가 거칠어요. '무......슨.......' '이만 잠들거라.' '...리......라.......' 그녀는 무릎을 굽힙니다. 오리우엘라는 그가 절명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킵니다. 얼굴에는 큰 감정의 동요 없이. 그가 숨을 멈출 때까지. 그리고 그가 완전히 절명하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라파의 눈을 감겨줍니다. 마지막 표정을 제 기억 속에 똑똑히 새겨넣지요.

그리고 다음 순간, 오리우엘라는 피가 물든 양탄자에 머리를 박습니다. 평생 그런 굴욕적인 모습을 보인 적 없는 사람이 숨이 턱턱 막혀서 그대로 무너집니다. 지금까지, 내전이 발발한 216년부터 220년, 이 5년 간, 아예 없는듯 묻어두었던 압박감들이 순식간에 터져나옵니다. 몰아치죠. 폭풍처럼. 그녀는 그처럼 궁그린 채로 억억 웁니다. 자신이 죽인 제 절반을 앞에 두고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쥐어짜요. 정말 나오지는 않습니다. 마치 눈물샘이 발달하기 전 아기들이 울듯이 목 쉰 소리만 나고 뜨거운 것은 흐르지 않아요. 그게 더 지치죠. 그녀는 그렇게 펑펑, 눈물도 없는 울음으로 반나절을 그 자리에서 보냅니다. 아마 이처럼 눈물이 나오지 않는 건 아직까지도 모든 압박감, 스트레스들이 그녀의 목 끝까지 차올라 있기 때문일 듯 해요. 할 일이 많습니다. 그 무의식적인 자기강제. 

그녀는 결국 엎드릴 때부터 예정했었다는듯 정확히 반나절 뒤에 일어섭니다. 라파의 피는 이미 굳어 있어요. 그녀는 자신의 가장 충실한 참모인 그나시오 백작을 부릅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오리우엘라의 중검과 사체를 보고는 순식간에 상황을 깨닫지요. 그는 어차피 라파에게 미련이 없었고, 내전을 치르며 이 어린 아가씨 - 사실 단 한 번도 그리 보인 적은 없지만 객관적인 팩트상 - 에게 엄청난 기대를 품게 되었지요. 매료됐어요. 그나시오는 그의 시체를 암살자의 짓이라고 공표합니다. 오리우엘라는 하루를 꼬박 죽은 듯이 잡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요. 그녀는 변했습니다. 그녀에게는 이제 무언가 지고 있는 것 같은 중량감이 사라졌습니다. 오리우엘라는 이전보다 더 당당하고, 앞뒤 재지 않고, 더 대담하고도 천재적인 제안들을 공산품처럼 찍어냅니다. 그 뒤 한 달 간, 그녀는 라프테냐의 대패를 완전히 회복합니다. 굉장한 기세였지요. 사람 자체가 달라진듯 보였습니다. 사선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여전하나, 그래도 마음껏 활개를 치다 산화하는 것이 보기에도 좋고 본인도 좋으니까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 오리우엘라는 아직까지도, 언제고 항상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마침내 무덤에서 부활한 듯한 그녀, 그녀의 사람들도 전부 기세가 올라 무니시팔을 칩니다. 연전연승하지요.

그리고 그 와중, 220년 4월, 미라이예 공작이 아우에게 죽습니다. 예. 잔루카가 체사레에게 죽은 거에요. 그리고 그는 미라이예의 일원화된 체계를 쥔 채 종적을 감춥니다. 가기 전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해 놨는지 미라이예 쪽 군대도 완전 증발해버린 상태에요. 무니시팔은 거의 당혹에 미쳐버릴 듯한 상태지만, 그런다고 잃어버린 미라이예의 세력이 어디서 불쑥 솟지는 않지요. 정확히는, 무니시팔에게 불쑥 솟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5월. 오리우엘라는 잉그레에 있었습니다. 연승 뒤의 망중한이었어요. 그녀는 잉그레의 연병장에 앉아, 이제는 실전 탓에 텅 비어버린 장소를 바라봅니다. 21년. 바쁘게 살았어요. 그녀는 만족해요. 머리가 가끔 미칠 듯이 아파오지만, 만족합니다. 적어도 오리우엘라는 이기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인생의 승리자에요. 순간 누군가 그녀를 부릅니다. 익숙한 목소리에요. 고개를 돌리니 그나시오 백작입니다. '용건만 말해.' '전하를 뵙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직접 보시면.......' 그리고 누군가 회랑을 돌아 나오지요.

오리우엘라는 인상을 찌푸립니다. 해가 너무 밝아요. 키가 크고, 덩치도 조금 있는, 잘은 모르지만 어딘가의 기사입니다. 남자는 그녀 앞에 멈추는 동작과 거의 동시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춥니다. 오리우엘라는 당연한 예를 받듯이 가만히 있습니다. 그녀는 발에 입맞춤을 받으며, 서서히 서서히 그 사람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고개를 듭니다. 오리우엘라는 말합니다. '체사레.' 이제는 경이 아닙니다.

그나시오는 이미 그의 모든 무기를 거둔 상태이므로, 더불어 오리우엘라 역시 엄청난 검술의 소유자이므로 먼저 물러납니다. 오리우엘라는 모든 것을 안다는듯이 조용히 말합니다. '왕계를 돌이킬 생각이 있으십니까, 네가 물었지.' '예.' '너는 내가 돌이키기 전까진 오지 않으려고 했지.' '하지만 돌이키셨습니다.' '너는 그것이 기쁜가.' '전하의 손으로 직접 하셨음이 제 무량한 기쁨의 원천입니다.' '얼마나 기다리려 했나.' '죽을 때까지 전하만을 기다리려 했습니다.' '라파는?' '저는 전하께 고두할 따름입니다.' '.......' '전하. 소인을 거두소서. 전하께서 저를 가엾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저는 갈 곳 없는 무뢰배가 될 것입니다.' 오리우엘라는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그의 어깨로 칼집을 떨어뜨립니다. 아프겠지만 그런 것은 이 수용의 의미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로써 체사레는 오리우엘라에게 합류하게 됩니다. 하루만에요. 다들 엉거주춤하니 어제의 적을 바라보는데, 거기다 대고 오리우엘라가 말하지요. 내 남편이 될 사람이다. 물론 그녀 옆에 선 체사레는 어제오늘 해서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지만,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다들 충격을 받은 상태로 물러납니다. 오리우엘라는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반대하기 전에 체사레와 혼인합니다. 바로 그날 저녁에요. 당혹스러울 정도로 빨리. 

그녀는 혼인 때 제시하는 이름에 오리우엘라만 써넣습니다. 체사레는 그녀가 채우는 빈 칸을 빤히 바라보고 있어요. 오리우엘라는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그 뒤에 덧붙입니다. '예거.' '오리우엘라 예거.' 예로부터 우슈탈 어로 왕이라는 뜻의 예거는 유명했지요. 체사레는 그 두 글자를 보고 웃으며 그 옆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합니다. '체사레 카아 빌라레알 얀 미라이예.' 그들에겐 요란한 식이 없습니다. 애초에 두 사람 다 그런 사람들이 아닐 뿐더러, 시기도 시기니까요.

그녀는 그날 너무 피곤해 터덜터덜 데카를로의 방으로 들어섭니다. 그곳 어딘가에는 아직까지도 라파의 핏자국이 남아 있을 것만 같습니다. 방을 옮기지 않은 건 어쨌든 제 죄값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홀로 어둔 방, 지새우는 밤. 그녀는 습관처럼 혼자 들어와 문을 닫으려다 체사레가 막자 아 하고 놀랍니다. 체사레는 뭔가 깨달은 충격에 멍하니 선 오리우엘라를 안아듭니다. 공주님 안기 말고요. 그냥 일곱 살 꼬마를 안듯 상대의 엉덩이를 받치고 고개를 제 어깨에 대게 하는 그런 안기요. 그녀는 그게 옛날의 감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직감해요. 울컥 솟습니다. 정말 산사태가 밀려오듯, 울컥. 그녀는 그의 목을 꽉 감쌉니다. 일곱 살로 돌아온 멍청한 기분이 듭니다. 일곱 살의 꼬마는 스물하나의 아가씨가 되었고, 열일곱의 소년은 서른하나의 장성한 청년이 되었는데요.

체사레는 큰 힘을 들이지도 않고 그녀를 안아올린 모양으로, 그녀의 가마부터 허리까지를 느릿느릿 쓰다듬습니다. 그는 그제야 처음 죄를 시인합니다. '죄송합니다.' 오리우엘라는 입술을 깨뭅니다. '전하께서 그리 행동하시기를 바란 것이 제 죄입니다. 그것을 감히 제 희망으로 삼았습니다. 전하의 감정이 어떠할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제 이기심 탓입니다. 저를 원망하십니까?' '당신이,' 체사레는 그녀를 안은 채로 침대로 갑니다. 창가의 빛이 내려앉는 쪽에 걸터 앉아요. 오리우엘라는 한숨을 쉽니다.

'당신이 나를 몰아세우려 했어도 내가 그러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당신의 뜻은 아무 의미가 없었을 터. 당신은 라파와 아무런 상관이 없지. 나는 나 스스로 나를 몰아세웠다. 내가 혐오스러워 하는 것은 내가 라파를 죽여서가 아니야. 내가 혐오스러워 하는 것은 라파를 죽이고도 아무 후유증이 남지 않은 나지.' '.......' '나는 라파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내 짐으로 여겼다. 그는 결코 내 원동력이 아니었어. 내 힘은 언제나 나였지.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나 말이야, 나. 라파는...... 내 혹 같은 것이었어. 그것을 지고 가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힘들어 하는 내가 싫었어. 미친 거지. 나는 모자란 게 없는 사람인데. 라파를 하나 지고 있다고 온 뼈마디가 꺾일 것 같다니.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나 스스로를 더욱 몰아세웠고, 그에 실패했을 때, 내 짐을 내려두었다. 라파를 죽였어.'

'전하.' '응. 말해 봐.' '제가 전하를 욕심낸 것이 전하께 해가 되었습니까?' '아니.' '그렇다면 제가 전하를 욕심내는 것이 전하께 해가 되겠습니까?' '아니. 계속 욕심내. 그래 봤자 내 안이야.' 체사레는 고개를 살짝 뗍니다. 그리고 오리우엘라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키스합니다. 그녀는 그를 인정합니다. 그는 숨을 떼고, 이처럼 말하지요. '예거.' 오리우엘라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서 떨어져 나갑니다. 침대로 굴러가지요. 그녀는 베개까지 굴러가다 턱 잡힙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묻습니다. '왜 당황하지 않았어?' 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 쪽으로 올라오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당신을 내 배우자로 고른 것.' '저 역시 그러했으니 놀라울 리 없습니다.' 오리우엘라는 웃습니다. 그리고 뭐.. 웃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