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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담벼락

대공작 부부 썰



등장인물:
바일모 지르젠티 이베빌 얀 미라이예
델라모레 기지 아코르티나 얀 미라이예
(델라모레 카사 얀 기지)


사흘 동안 트위터에 열심히 도배했습니다. 읽어 주신 분들 감사드려요~







대공작의 이름은 바일모 지르젠티 이베빌 얀 미라이예, 대공비의 이름은 델라모레 기지 아코르티나 얀 미라이예입니다. 결혼 전에는 델라모레 카사 얀 기지였고요. 이들은 공작이 스물넷, 공비가 스물하나일 때 꽤 느즈막히(!) 결혼했습니다. 이 부부는 의외로 왕도가 아닌 미라이예 영지에서 처음 만난 사이입니다. 완전 촌구석요. 델라모레가 휴양차 미라이예 영지에 방문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녀가 미라이예의 허락을 맡고선 성에 머무는 와중, 공작도 일이 있어 잠깐 내려왔던 것이지요. 여차저차하여 공작은 그녀와 같이 머무는 성에서, 그녀에게 리베 대우를 해 주면서 한여름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는 한 계절 뒤 좋게 인사하고 왕도로 올라가요. 아무 미련 없이! 사실 델라모레는 이 여름 동안 젊은 공작에게 약간의 연심을 품게 됩니다. 훤칠하고 친절하고 지위도 높고. 그녀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왕자님이거든요. 그러나 아무래도 공작이 제게 관심이 없는 듯 하고, 가문의 격차가 너무 크고,(그녀는 지방 일개 소영주의 딸이랍니다.) 그녀 자신도 여러모로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서 결국 마음을 접습니다. 델라모레 역시 그가 떠나자마자 다시 제 영지로 돌아가버려요. 그때 그녀가 열일곱이었고, 공작은 스물이었습니다. 차차 시간이 지나고 델라모레는 스스로 지위 높은 이를 본 일이 드물어, 자신이 그를 동경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헷갈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러요. 이쯤되면 이쪽은 완전히 가라앉은 셈이지요.

시간은 흘러흘러 금세 한 해 반이 지납니다. 델라모레는 슬슬 결혼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희한한 제안을 했어요. 왕의 첩이 되랍니다. 그녀는 몇 날 며칠을 고민했지만 결국, 자신의 아버지는 지금 시점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자신을 팔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남작은 항상 델라모레의 신부대에 집착했었거든요. 델라모레의 생각으로는, 그나마 아버지가 황금 낚시찌를 물어와 자신을 꿰려드는 지금 수락하는 게 나을 것 같았죠. 그래서 그녀는 곧 아버지의 제안을 수락합니다. 채비도 얼마 하지 못하고 잉그레로 떠나게 되지요.

그런데 잉그레에 도착해서 어리둥절한 왕(자카리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아무튼 자카리의 아버님이십니다)을 만나고 들은 말은, 넌 누구냐는 말이에요. 델라모레는 당혹해서 저... 여기.... 직첩이...... 어버버 더듬습니다. 왕은 여전히 영문을 몰라요. 자기는 그런 약속을 한 일이 없답니다. 델라모레는 완전히 당황하고 계면쩍고 해서 거진 패닉 상태에 빠지죠. 원체 순한 사람이라, 왕 앞에서 이런 난데없는 무안과 꼬인 상황을 맞닥뜨리니 견디질 못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녀는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라도 자신을 후궁으로 맞아달라 요청합니다. 왕 입장에서는 황당하죠. 어디서 처음 보는 소녀가 와서 숨겨진 당신 후궁이었다네 어라 아니었나 그럼 지금이라도 후궁시켜주세요 하고 있으니... 그래도 왕은 왕이라서 그는 이 아이가 완전히 당혹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자기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도 모르는 거에요. 왕은 어디서 무슨 사기를 당하고 온 거냐 멍청하게 라는 말은 예의상 하지 않고, 일단은 별궁에 거처를 내줄 테니 좀 쉬다 집에 내려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널 후궁으로 맞이할 생각 없다는 말도 덧붙이고요. 델라모레는 알현실에서 끌려나오고 나서야 점차 현실 자각이 되면서 맥이 쫙 풀립니다. 왕의 내심마따나, 아버지가 어디서 사기를 당하고 온 것이 분명했거든요. 그녀는 왕이 내 준 방에 가서 펑펑 웁니다.

서러워 죽겠어요. 아버지가 너무 한심해요. 가문도 한미하고 재력도 없는 와중 어떻게든 만만한 여인을 위로 팔아보려는데 그럴만한 머리도 없어요. 이대로 내려갔다간 자신은 아버님께서 사기를 당하신 거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꼼짝없이 분노한 아버지의 꾸중을 듣고, 즉각 돈 많은 귀족의 세 번째 재취 정도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갑자기 바깥에서, 누군가 자신을 찾아왔답니다. 델라모레는 아는 사람 없고 만날 생각도 없다고 이만 가시라 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라이예 공작이랍니다. 그녀는 덜컹했지만 자신의 바보같은 행적을 전부 들었을 사람과 재회를 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래도 가시라 또 한 번 거절하니, 리베의 말을 어길 수 없는 기사는 한참을 기다리다 떠납니다. 델라모레는 아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공포가 엄습하면서 즉각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녀는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고 정말 바로 다음날에 떠나기로 일정을 잡아요. 다음날. 델라모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복으로 덮은 채 그대로 왕도를 떠나려 합니다. 그런데 위세도 뭣도 없는 한미한 가문의 여식이 잉그레 안이나 2곽 안에서 마차를 탈 수 있을 리 없거든요. 결국 그녀는 몇 명의 하녀와 함께 2곽을 걸어 3곽까지 나갑니다. 그리고 도중에, 공작과 재회하게 되지요. 정말 말그대로 길 한복판에서 마주쳤습니다. 그는 사실 처음에는 그녀의 정체를 몰랐는데, 델라모레가 너무 놀라 딸꾹질을 해서 그녀를 알아차려요. 공작은 그 즉시 델라모레에게 인사하고, 그녀가 경황이 없는 사이에 솔 미라이예 안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델라모레는 가야 되는데 가야 해요 하지만 영 먹히질 않습니다. 공작은 우선 그녀의 면사포를 먼저 벗겨두고 오랜만에 재회한 뒤, 안부를 묻습니다.

델라모레는 방금까지 당혹했던 것을 잊고 화가 치솟는 것을 느껴요. 공작이 왕에게 제 멍청함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안부를 묻는 모양이 매우 같잖아요.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노여움과, 제 처지에 대한 비관과 한심함, 자괴 등을 뒤섞은 감정으로 욱하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공작은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상대가 너무 서럽게 우니까 일단은 그녀를 가장 좋은 손님 방에 머물 수 있도록 합니다. 델라모레는 복받쳐 엉엉 울면서도(아직 열여덟입니다!) 그런 자기에 대한 한심함을 참지 못해서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를 씁니다. 아버님은 사기꾼들에게 당하셨다, 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왕도에 있는데, 내가 갈 때까지 내게 화를 내고만 있지 말고 다음 생각을 해 달라, 어디든 상관 없으니 빨리 아무 남자에게나 가서 이 소동을 묻어버리고 싶다.

그런데 이걸 우연찮게도 공작이 봅니다. 그녀가 바깥에 전해달라 하녀에게 건넨 것이 어쩌다 꼭대기층으로 올라가게 되었거든요. 공작은 다음날 델라모레에게, 사정은 알겠다, 그럼 나랑 약혼하면 어떠냐고 말합니다. 그녀는 자신과 장난 치나 싶어서 코웃음도 치지 않습니다. 다만 남의 편지는 왜 보냐, 난 이만 가겠다는 식으로 짜증(양순한 그녀 기준에서의 짜증입니다)을 낸 뒤 편지를 빼앗습니다. 떠나려는데 공작이 다시 말로 붙잡지요. 싫어요? 싫어요! 내가 싫어요? 싫다니까! 그럼 지금가면 어디로 가시게요? 폐하께 낯도 팔았는데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영지로 내려가야지요! 소문이 퍼지기 전에 결혼하는 게 가장 웃음 사지 않을 테니 그럴 겁니다! 그에 공작은 그러니 잠깐 여기서 나랑 가짜라도 약혼을 해서 머무르라고 합니다. 잉그레에서 웃음거리가 될 짓을 했다는 사실은 약소한 귀족의 딸이 공작의 약혼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비할 바가 못되기 때문이라고, 그는 이유를 대요. 게다가 이로써 추문이 좀 사그라들면 그녀는 저와 파혼하고 내려가서, 미라이예의 전 약혼녀라는 좋은 전직명으로 괜찮은 남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도 합니다. 델라모레는 마지막 말에 결국 넘어갑니다. 자신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몸값 높이기라는 사실은 그녀도 아주 잘 아는 바였거든요. 폐하께 사기 공갈을 쳤던 여자와 미라이예의 전 약혼자는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녀는 이 사람이 내게 왜 이렇게까지 큰 호의를 베푸나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가장 좋은 동앗줄이라 덥썩 잡았을 뿐이지요. 결국 그들은 약혼을 합니다. 

여기서 공작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공작은 사실 델라모레에게 첫 눈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왕도로 올라와서 제 주변 모든 것을 싹 정리정돈한 뒤, 바쁜 일을 몇 개 치르고 그녀를 왕도로 초대하려 했어요. 그 뒤는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소식을 보내기도 전에 이 사람이 덜컥 왕도로 올라온 거에요. 도대체 무슨 용건인가 어이가 없어 잉그레로 들어가는 델라모레를 보는데, 나중에 왕을 짤짤 흔들어 듣자니 어째 쟤가 내 후궁이 된다고 왔노라며 성을 뙇 냅니다. 왕이 도대체 왜 얼굴 한 번 안 본 시골 처녀를 후궁으로 들이겠습니까? 주변에 널린 여자가 화려한 귀부인들인데요. 두 번 볼 필요도 없이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주워듣고 왔거나, 그냥 멋모르고 사기에 당한 겁니다. 공작은 이전보다 더 기가 막혀서 끝끝내 델라모레를 불러들이고, 이것저것 말 될 법한 궤변으로 그녀를 제 약혼자로 만들어버립니다. (이쯤에서 생각하는 건데 발렌시아가 제 아버지의 이런 면모를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지금 사태가...)

각설하고, 델라모레는 아버지에게 이 가짜 경사를 전달하고 솔 미라이예에 거처를 정합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이미 일 년 전 가졌던 미묘한 감정이라곤 하나도 없는 상태에요. 너무 다사다난해서 간질거림을 느낄 틈도 없는 것이지요. 델라모레는 그곳에서 한 해 간 머물면서 공작과 친밀한 관계를 쌓습니다. 원체 성격이 착해 주변의 견제라곤 잘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이라, 공작에게는 차라리 다행이었어요. 미쳤다고 제 약혼자에게 물리적인 피해를 끼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델라모레가 사람들이 공격을 멈출 때까지 정서적으로 다치지 않고 지내는 것만이 그의 관건이었거든요.

물론 공작이 이렇게 착실히 식탁을 치우는 와중에도 델라모레는 그를 결혼 상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아하기는 해요. 그러나 연예인과 팬 사이의 감정이랄까요. 델라모레는 이미 예전에 그가 냉랭(?)하게 떠났던 것으로 그들 간의 격차를 확실히 깨달았었거든요. 공작은 그 거리감까지는 자기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설득하거나 윽박질러서 해결될 감정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그냥, 계속 잘해주면서 그녀가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겠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단이 터집니다. 약혼한 지 정확히 일 년 만에, 델라모레는 지금껏 감사했으니 저는 이만 가려구요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어감은 일 년 전과 거의 다를 게 없어요. 공작은 지금껏 자신이 뭘 한 건가 싶어서 기가 딱 막히지만 그래도 우선 그녀를 말립니다. 저는 벌써 열아홉이에요. 벌써? 아직입니다. 결혼하고 싶어요. 여기서 저랑 하라는 말이 혀 끝까지 나왔지만, 실제로 나올 뻔했지만, 그는 뒤이은 말에 입을 꽉 다뭅니다. 사실 괜찮은 곳에서 이야기가 들어왔어요. 공작은 미라이예의 약혼자에게 손을 대려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았지만, 델라모레는 무덤덤하게 이어 말하죠. 아버지께서 제 혼사가 곧 깨질 것 같다고 이곳저곳에 광고를 해 두셨거든요. 제 금테 명패를 노리는 젊은 귀족들이 많아요. 감사합니다. 공작은 어이가 없지요. 누구 좋으라고 죽 쒀서 남을 준답니까. 그 괜찮은 곳이 어딥니까? 그 속에는 나보다 낫냐는 말이 있었지만 델라모레는 그저 공손하게 답합니다. 이번에 들어온 혼담은, 고레티 백작의 둘째 아들입니다. 그는 눈썹을 치켜 떠요. 고레티는 북부 루틸로 후작의 첫째 가는 수하요, 손꼽히는 기사 가문이지요.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겁니다.

'약혼을 하면 또 다시 관습처럼 1년을 기다려야 하니, 지금 공과 파혼하고 저쪽으로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더 늦어지면 저로서도 곤란해서요.' 제가 당신에게 마음이 있습니다. 예?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 라모레- 저, 공.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공작은 인상을 찌푸리지요. 다시 말씀해 보십시오. 마음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면? 파혼시켜 주세요. 아버님 재촉이 심하십니다. 

델라모레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습니다. 그녀는 사실 이 남자가 자기를 가지고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그런 낌새를 하나도 안 보이다가(!) 막상 자신이 좋은 혼처를 찾아 떠난다니까 무턱대고 고백이라니요? 공작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이제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리 심각한 감정이 아닐 확률이 높아요. 그리고 그녀로서는 이미 열아홉하고도 절반, 더 이상 혼사를 인내할 시간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델라모레는 험악한 공작을 앞에 두고 끝까지 강짜를 부립니다. 지금까지는 정말 감사했다.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가면 약소하나마 호의에 보답하도록 하겠다. 공작은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리고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델라모레를 집무실 바깥으로 내쫓고, 즉각 파혼을 처리합니다. (사실 앙히에의 성격은 아버님에게서 온 겁니다. 발렌시아는... 탁월한 검이나 전장에서의 능력, 성실함 정도가 대공작의 흔적이 될까요?) 델라모레는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니 좀 마음이 써서, 마지막 인사를 하려다가 더 쫓겨납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결국 제 고향으로 돌아가요. 공작은 그동안 차라리 공비 말고 첩으로 대우해 준다 할 것을, 그러면 아예 사이가 불가능하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았을 텐데 후회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델라모레는 버선발로 마중 나온 아버지에게 환영받고는 즉각 새로운 약혼식을 치릅니다. 요모조모 뜯어봐도 썩 괜찮은 남자였어요. 나이도 기껏해야 스물여섯에, 서글서글하게 생겼고, 권력도 돈도 있고, 무엇보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좋았어요. 델라모레는 정말 흡족했다가, 그의 다음 말에 놀랍니다. 헌데 죄송하지만 일 년 동안 왕도에 다시 가 계셔야 합니다. 왜, 왜요? 제가 왕도에 있어야 해서요. 델라모레는 당황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일 년 간 얼굴을 마주하며 살다 온 공작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거든요. 저, 아시다시피 저는 직전에 공작과의 약혼을 깨서 쉽사리 돌아가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조금만 헤아려 주세요. 그러나 이 새로운 약혼자는, 부드럽지만 단호합니다. 가셔야 합니다. 그들은 여러 번 실랑이를 하지만, 결국 델라모레가 물러서요. 어차피 결혼할 사람이니까요. 

한 달 뒤 그들은 다시 왕도에 올라갑니다. 아니나 다를까, 왕에게 약혼을 제출하기 위해 잉그레를 가는도중 공작과 마주칩니다. 저쪽은 사납게 눈을 부라립니다만, 별 말은 없습니다. 델라모레는 순간적으로 눈물 날 만큼 반가웠다가, 결국 살짝 인사만 한 뒤 지나갑니다.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 뒤 델라모레는 솔 고레티에 머물며 거의 바깥에 얼굴을 보이지 않습니다. 

한편 공작은 그녀가 보여도 미칠 것 같은데 안 보이니 더 미칠 것 같습니다. 자신 역시 바람 불면 깨지랴 안에 두었던 건 기억도 못해요. 다만 델라모레가 다른 남자, 그것도 약혼자의 저택에서 함께 있다는 것에 정말 돌아버릴 정도로 화가 나는 겁니다. 지위를 가지고 눌러버릴까 생각은 했지만 바로 그 지위 때문에 델라모레가 자신을 특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가 없습니다. 공작은 매번 너무 화가 나서 어떻게 계획도 제대로 만들지 못합니다. 일전에 그녀를 옭아매던 여유는 온데간데 없어요.

그렇게 얼굴을 못 본 지 한 달은 되었을까, 하루는 델라모레가 찾아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혹시 공작님을 뵐 수 있겠느냐 아랫층에서 묻지요. 공작은 그때 계단으로 내려오다 그 말을 듣습니다. 그는 답도 해 주지 않고 그녀를 끌고 올라갑니다. 델라모레는 안 이러던 사람이 왜 그러나 싶지만 아무튼 용건도 있고 해서 그를 졸레졸레 쫓아갑니다. 공작은 그녀를 자기 집무실로 들여보냈구요. 그녀는 어색하게 서서 짧게 용건만 말하겠다고 합니다......만 공작은 그대로 키스를 합니다. 아유 부끄러워.

델라모레는 기겁을 하죠. 일단 첫키스인 건 맞지만, 그 느낌보단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믿겨지지가 않는 거에요. 얼굴이 그의 양손에 갇힌 모양으로 정말 잡아먹힐듯 키스를 당하니, 순진한 그녀로서는 진짜 울먹거릴 만도 하지요. 발버둥을 치지만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가끔 숨이 트일 때조차도 공, 좀, 놔 주, 제발, 이 정도밖에 못 내뱉어요. 도무지 숨 쉴 틈을 주지 않아서. 그리고, 정말 한참 뒤에, 공작은 그녀에게서 얼굴을 뗍니다. 물론 손은 아직 그녀의 양뺨에 있어요. 델라모레의 남빛 눈은 정말 울음을 있는대로 참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녀는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합니다. 놔줘요. 뭐하는 짓이에요. 미라이예 공. 지르젠티 경이라 하십시오. 바일모도 괜찮고. 제가 왜요? 델라모레는 그가 낮게 말하는 그 상황에서도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하지만 물론 될 리가 없고요.. 그녀는 겁을 먹었어요. 계속해서 턱은 반 들려 있고 코앞에 얼굴이 있어 당장이라도 저 남자가 다시 닥칠 것만 같거든요. 그러다가, 듣지요. 제가 지금 당장 당신을 파혼시킬 예정이니까. 델라모레는 한 대 맞은듯 멍했다가 바로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리고는 무슨 무례냐 합니다. 아무리 당신이 미라이예라지만 이쪽도 고레티에요.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실- 저는 내일 부로 그 집안을 실각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할 말을 잃지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잃은 건 아니에요. 그녀는 묻습니다. 공작. 저한테 왜 이러세요? 당신을 사랑한다 말씀드렸습니다. 공작. 알겠어요. 당신의 마음만큼은 마음은 정말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결혼할 사람이 있는 몸이에요. 아시잖아요. 모릅니다. 당신은 원래 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요? 제가 언제부터? 약혼은 공의 호의셨잖아요. 그것 가지고 지금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라면 저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스칸사가 기다려요. 그 남자는 스칸사고, 나는 공작입니까? 내 남편이 될 사람이잖아요! 그럼 지난 일 년 간은 왜 그러셨습니까? 저는 한 번 허락을 맡은 뒤에는 항상 당신을 라모레라고 불렀습니다. 대우가 이렇습니까? 공작. 더 대답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염치 없이 당신이 계시는 왕도에 올라온 것을 사과드리려 했는데 방금 키스로 그마저 버렸습니다. 그리고 공작. 제 사람이라는 말씀은 함부로 하시는 것 아닙니다. 아니오. 전 말을 함부로 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제 사람이 맞습니다. 저는 당신을 처음 본 그날 오후의 마라디아가에서부터 주욱 이처럼 생각해왔습니다. 

델라모레는 그 말에 귀를 의심하지요. 마라디아가? 언제 그런 마음을 품으셨다고 애정을 과장하십니까? 과장한 적 없어요.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시는 듯 해 더 짚고 지나가지는 않았지만, 혹시 내가 떠나던 날 확인해 달라던 곳은 확인해 보셨습니까? 델라모레는 분명 그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팬던트 안을 깨끗히 하라고 했었어요. 그녀는 항의합니다. 그건 그냥 인삿말이잖아요! 저는 아니었습니다. 델라모레는 순식간에 열일곱이 되어서 초조해집니다. 자신은 그때 걸치고 다녔던 팬던트를 거의 버리다시피 어디 구석에 버려두었거든요. 볼 때마다 공작이 생각나서요.

공작은 애써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하는 델라모레의 모습이 사랑스러운지 다시 키스합니다. 또 놀라 버둥거리는데 상대방은 또 개의치 않지요. 그녀는 거의 자포자기한듯한 태도로 그에게 붙잡혀서 키스를 받아요. 약혼 기간 동안 엄숙함을 요구받는 기사의 딤니팔이라, 아무래도 이건 자기들이 아무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드디어 터진 느낌이었어요. 그는 키스를 넘어서 그녀의 목으로 내려가, 아니, 더 내려가요. 공작은 쇄골 아래, 그가 풀어헤친 가슴골에 입을 맞추다가, 눈치를 살피듯 다시 그녀를 올려봅니다. 델라모레는 아직까지도 팬던트를 생각하는 중이었어요. 아무래도 저 사람이 그때부터 자신을 줄곧 좋아해왔던 것 같습니다. 어디있더라, 펜던트 하다가, 그제야 공작을 눈치챕니다. 델라모레는 말하죠. 여기는 싫어요. 그날 그녀는 외박을 합니다.

다음날 그녀는 즉각 고레티 백작 아들네미와 파혼을 합니다. 공작은 세상 다 가진듯 그저 기분이 좋아서 그녀만 안고 다니려 해요. 그런데 그러려고 보는데, 이런, 델라모레가 없습니다. 파혼을 처리하고 다시 솔 미라이예로 돌아오지 않은 건가 싶었지만, 밤이 되도록 감감무소식이니 좀 이상한 거에요. 그리고 그제야 이야기를 들어요. 또 왕도를 뜨셨답니다. 공작은 그제야말로 진짜 확 꼭지가 돕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몇 번을 우롱한지 모르겠어요. 자신은 해 줄 만큼 해 줬는데 도무지 그만한 보답이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그녀를 처음으로 안은 것도 물론 행복했지만, 그에게 그보다 더 필요한 건 델라모레의 마음이거든요. 그런데 어제 분명히 봤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이란 놈이 또 왕도를 벗어난 겁니다. 그는 이제 자기 쪽에서도 인내할 생각이 없어요. 그가 생각하는 지금 상황은 자기 진심이 하룻밤 상대로 조롱당한 거거든요.

그래서 즉각 잉그레에 갑니다. 왕은 화들짝 놀라죠. 평생 안 오던 놈이 웬 일이냐? 십이공회 날 아니다. 폐하. 지금 당장 동부원정 총사를 바꿨으면 합니다. 누구로? 저요. 어? 너 다시는 안 나간다며? 그가 그런 말을 하기는 했었지요. 즉각 델라모레를 공비로 들일 생각(김칫국)을 하면서 주변 정리를 시작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자기도 이제 진이 빠지거든요. 

한편 델라모레 쪽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시달리는 와중에도 꿋꿋히 그 팬던트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걸 찾아서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그것을 자기가 직접 봐야 그를 진짜라고 확인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때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때 나도 그에게 있어 무엇이었다. 증명 받고 싶었던 거지요. 그래서 황급히 가까운 기지 영지로 내려간 겁니다. 어차피 하루이틀이면 돌아올 텐데 공작이 소동을 낼 리는 없고요. 그녀는 결국 영지의 성에 돌아가서 온갖 곳을 다 뒤집고, 모두를 심문해서, 겨우 자신의 옛 팬던트를 찾아냅니다. 아, 생각해보니 팬던트가 아니라 로켓이네요. 죄송합니다. 로켓으로 정정합니다. 아무튼 그녀는 그 로켓을 찾아, 숨을 참고 열어 봅니다. 이상한...... 검은 돌이 있습니다. 진짜 손톱만한 거요. 그녀는 순간적으로 깨닫고는 다시 뚜껑을 꽉 닫아요. 저건, 롬이에요. 롬이 있어요. 사람의 기억을 새기는 돌. 리마네레에서 내려온 돌이라 이제는 어떻게 값을 매길 수조차 없는 귀한 것입니다. 공작이 그 자신을 담아 고스란히 넘긴 셈이에요.

델라모레는 희열에 들떠서 행복하게 그것을 매고 다시 왕도로 돌아갑니다. 사뭇 당당하게 솔 미라이예로 들어가요. 동정 받는 위치부터 사랑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주터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니, 더 이상 지위는 별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던 거지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공작이 그 이틀 사이에 동부로 떠났답니다. 델라모레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던 의심을 하지요. 한 번 자니 미련이 떨어진 걸까? 

활짝 폈던 사랑은 이제 많이 의기소침해집니다. 이제 완전히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니까요. 고레티와도 연을 끊었고, 자신은 이제 스물이고. 공작은 동부에, 그것도 동부원정에, 그것도 총사로 떠났네요. 그토록 폐하의 명이 엄중했겠지 생각하고도 상심한 마음은 쉽사리 가시지 않습니다. 그래도 정을 나눈 사인데 작별인사 한 번 하고 가지도 않냐고 내심 원망해요. 그리고 주인 없는 집에 홀로 있기도 뭣하니까 그냥 터덜터덜 나오지요. 로켓은 여전히 목에 있고요.

델라모레는 우울하게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돌아갑니다. 왜 왔냐고 해서 맞아 죽을 각오로 그냥 파혼했어요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전처럼 제 남편 문제에 그리 크게 신경을 쓰는 기색이 아닌 거에요. 그녀는 궁금했지만, 묻지 않아요. 긁어 부스럼 만드는 꼴이 되면 어떡하나요? 그 뒤, 델라모레는 쓰게 웃으며 칩거합니다. 

한편 공작은 맘을 딱 잡고 동부까지는 왔는데, 이 상황에서 몸 성하고 마음 성할 리 있겠습니까. 이쪽도 전장에서는 발렌과라 이럭저럭 잘해내기는 하는데 깨어있는 시간 잠든 시간 할 것 없이 델라모레가 보이지요. 아득바득 오기로 석 달은 참습니다. 그 뒤, 이 정도면 나도 그녀를 애타게 할 만큼은 한 거다 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러고도 델라모레가 다시 자기에게서 등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 갔으면 어쩌나 대단히 불안해서(사실 이 마음이 더 커요) 솔 미라이예 쪽에 연통을 보냅니다.

듣자니 델라모레가 합하께서 떠난 지 하루만에 돌아오셨다, 다시 가셨답니다. 공작은 당황합니다. 자기 발로 떠났으면서 왜 이틀만에 돌아왔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동부에 앉아서 될 수 있는 한 이곳저곳을 수소문합니다. 미라이예 쪽에서 위로금 조로 엄청난 돈을 대 준 기지 남작에게서 연락이 옵니다. 알론조 캄비로 갔답니다. 그것도 좀 된 일이래요. 쉬러 간다고는 했는데....... 공작은 철렁 내려앉습니다. 알론조 캄비는 대륙 유일한 성지로서 그곳에 머무른다 하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사제라는 표시거든요. 그는 아비된 사람이 그녀의 정확한 의사도 확인하지 않고 그곳에 가게 두었다는 말에 노발대발해요. 미라이예에서 돈을 주니까 이제 딸에는 관심이 없어진 모양이에요.

이 소식을 들었을 때가 오월도 중순. 공작이 동부원정을 치른 지 반년도 안된 시점입니다. 그는 알론조 캄비에 연통을 보내보지만 아무런 답이 없을 것을 알아요. 애초에 사람의 법이 미치지 않는 장소니까. 공작의 솔정을 보내도 죄다 쫓겨나요. 그러자 공작은 급해서 동부 반-나티나모 근방까지 싹 쓸어버립니다. 이게 칠월 초, 슬슬 지나치게 더워질 시점이 되어서, 동시에 동부가 이번에 너무 큰 피해를 입어서 휴전협정이 맺어집니다. 

그동안 공작은 제대로 된 휴전협정만 맺고 나온다고 왕에게 몇 번이나 강조를 했습니다. 덕분에 그는 휴전협정을 체결한 뒤 이미 옆에서 각 잡고 대기 타고 있던 후임자(톨레도 백)에게 총사직을 넘기고는 슬쩍 전장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도로 가는 게 아니라, 알론조 캄비로 가지요. 도착하니 칠월 말. 마지막으로 만난 시점이 작년 십이월이었지요. 그는 개인 자격으로 방문했다는 점을 주지시키며 혹 리베 기지가 계신다면 뵙게 해달라고 해요. 그 답이, 그분께선 이미 정사제가 되셔서 안된다였으면 그는 정말 그 자리에서 깽판을 놨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쪽에선 잠깐 어리둥절 있다가 그래 알았어요 하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공작은 평생 동안 있던 일 없을 정도로 초조해 있어요. 그녀가 그냥 심신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이곳에 휴양하고 있는 게 아니면 어떡한답니까? 물론 그는 그녀를 강제로 말에 태울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아무튼 델라모레가 나옵니다. 그녀도 영문을 모르는 모습이에요. 공작은 자신이 방금 전 사제에게 정체를 안 밝혔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그녀는 그를 보고선, 헉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하지만 공작이 더 빨랐어요. 지금 당신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내게 시위합니까?

델라모레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지요. 공작. 하룻밤을 보낸 다음에 인사도 없이 떠난 사람이 누군데요? 라모레. 그건 내가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당신은 그날 낮에 이미 왕도에 안 계셨습니다. 저는 그 부재에 절망하고 마침 들어온 동부원정 이야기에 수긍하고 떠났습니다. 무슨 변덕으로 이틀만에 다시 왕도에 돌아오셨습니까? 떠나고 보니 공작이 아쉬우셨습니까? 일곱 달 내내 계속 델라모레 앓이를 해왔으면서 정작 만나서 하는 말이 저 꼬라집니다...... 한심하지요.... 아무튼 델라모레가 아무리 착하다지만 이런 말에 화를 내지 않을 정도로 속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품에서 뭘 꺼내더니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칩니다. 보니까 자기가 준 롬이에요. 

공작. 내가 왜 떠났냐고요? 그게 '떠난' 건가요? 당신은 쓸 줄을 몰라요 아니면 문맹이에요 아니면 그냥 멍청한 거에요? 돌아간 곳도 뻔히 말해뒀는데 왜 편지 한 통 안 보내고 날 버렸다 화를 내십니까?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십니까? 제가 당신 앞에 가서 고개라도 조아리며 잠시 고향에 다녀오겠다 허락을 맡았어야 하나요? 예. 뭐라고요? 제가 자유를 드렸더니 당신은 이따위 곳까지 오셔서 칩거하고 계십니다. 제가 달리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당신을 안은 날 지체 않고 당신을 공비로 만들 걸 그랬습니다. 공작! 하나하나 차분히 말씀드리지요. 우선, 저는 그날 당신이 언급했던 로켓을 확인하러 갔습니다! 찾아서 왕도로 돌아오니 제게 백 번 청혼했던 분은 온데간데 없더군요! 남긴 말도 없이! 저는 이미 스칸사와- 고레티 남작. 웃기지 말아요. 스칸사! 스칸사! 스칸사! 저는 스칸사와 파혼한 상태였죠! 정인이라 생각했던 분은 말 한 쪽 없이 전쟁터에! 맙소사 전쟁터에 가셨다죠! 아버지도 더 이상 제게 관심이 없으시죠! 고향에 있기도 눈치 보이죠! 그래서 캄비로 나왔어요! 사제가 되시려고? 당신 지금 비꽈요? 아직은 예비에요! 당신이 돌아와 나를 찾으면 가고, 아니면 끝내 여기에 머물려고! 공작은 그녀를 붙들어요. 그럼 가면 되지요. 당장 떠납시다. 공작- 어차피 당신이 안 오신다 해도 상관하지 않을 예정이었습니다. 억지로라도 솔 미라이예에 데려갔을 테니까요. 저는 당신 이외의 공비는 상상해 본 일이 없습니다. 공께선 반 년 동안 연락 한 번 없으시고! 

공작은 그녀를 냅다 안아 올립니다. 델라모레는 헉 놀라서 반항하지만 방금 전까지 전장을 돌던 남자인데, 소용없지요. 공작은 그런 그녀를 제 말 위에 태웁니다. 델라모레는 높은 곳에 벌벌 떨면서 말 목을 꽉 안아요. 눈까지 질끈 감고, 이것저것 그녀로서는 평생 입에 담은 일이 없는 험한 말을 쏟아붓지요. 주 내용은 나를 버린 줄 알았어요 개자식아 정도에요. 공작은 대꾸도 없어요. 그저 덜덜 떠는 그녀를 말 위에 앉혀두고는, 같이 데려왔던 말 한 마리를 끌어 자기가 올라타요.(롬은 슬쩍 주워 담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짐이 있다는 델라모레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냥 알론조 캄비에서 끌고 나와요. 공작으로서는 일단 아내될 사람이 그곳에 있는 것 자체가 싫은 거에요. 현대에 비유하자면 약혼자가 수녀원에 들어가 있는 것이랑 똑같으니까요. 

아무튼 그는 가장 가까운 영지에서 가장 좋은 마차 한 대를 협박해서 끌어낸 다음, 정말 쏜살같은 속도로 왕도로 돌아와요.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제 여자로 묶어둘 작정이에요. 그런데 왕도에 도착해서 서명하시라 금석증을 내미니까, 델라모레는 왜 약혼 기간도 없이 결혼하냐고 항의해요. 공작으로서는 사실 지난 사 년 가까이가 전부 꾹꾹 참던 약혼기간이었는데.... 그러나 델라모레는 약혼부터 하라며 서명을 안 해요. 계속 고집 피워요. 사실 이건 지난 반 년 동안 하루하루 초조하고도, 결국 그에게 단박에 넘어온 델라모레의 소심한 복수지만 그는 모르지요. 공작은 부글부글 끓습니다. 하지만 이길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 하마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반 년 가량을 지냅니다. 델라모레는 엄격한 딤니팔의 전통에 맞춰서 자기한테 키스도 못하게 해요. 수절하는 공작의 항의는 받지도 않습니다.... 결국 어느날 그녀는 (약혼자가 준) 술을 진탕 마시고 금석증, 즉 결혼 서류에 서명을 하게 됩니다. 아침에 깨선 기억도 없는데 공작이 우리 이제 결혼한 거라며 자랑합니다. 뭐라고요? 이미 폐하께 제출하고 왔으니 나중에 돌려 받으면 보시지요. 예? 저는 서명 안 했어요! 돌려 받으면 보십시오. 안 했어요! 이제 바일모로 부르셔야 합니다. 한 번만 더 공 소리 해 봐요. 서명 안 했어요! 물론 공작은 자기 침대에 앉아서 새소리 같은 해명을 하는 부인을 봐 줄 생각이 없었고... 수절했으니까요..... 아무튼 한참이나 뒤에 돌아온 금석증 먹지본을 보여줍니다. 델라모레는 무례하십니다 어쩌다 하면서 당하다 자기 서명이 확실한 것을 보고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공작은 어안이 벙벙한 그녀를 한 번 더 안고 결혼식은 대영지에서 하는데 내일 내려갈까요? 이런 말이나 하고 있고요. 델라모레는 경황이 없어서 윽윽 하다가 정신 없이 승낙하고, 실제로 다음날 내려가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아! 드디어 결혼했습니다!

여기서 이 커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할까 하다가 뒷이야기를 붙입니다.

델라모레로서는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요. 아무튼 혈기왕성한 공작님 덕분에 그녀는 결혼 두 달만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결국 뒤늦게 유산이 되었어요. 그래서 십 년 넘게 아이가 없다가, 드디어 다시 아이를 가지십니다. 첩을 들이라느니 하는 공격이 나올 때라 둘 다 너무 기뻐해요. 공비가 서른 하나, 공작이 서른 다섯일 때 일이지요. 그때 엄청난 태교로 나온 아이가 발렌시아......... 음........ 그리고 오 년 뒤 다시 아이를 가졌는데 이 아이가 앙히에지요. 그런데 델라모레는 앙히에 출산 직후 좀 극심한 산욕열에 시달립니다. 살아남은 게 다행이라고 말할 정도로요. 이때 그녀를 살린 사람이 새파랗게 젊던 모리입니다. 그러나 약화된 건강은 어떻게 회복할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사 년 뒤에 폐렴에 걸려 세상을 뜹니다. 공작은 손수 장례를 치르고 그 뒤 일에만 전념해요. 그리고 아내보다 거의 스무 해나 더 산 뒤 운명하시지요. 음...... 그래서 다섯 살의 앙히에는 열 살의 발렌시아가 키웠고요. 열다섯 살의 앙히에는 양어머니(?)를 배신했지요. 현재 공작은 전통대로 본가 지하 장묘에 부부가 함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