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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ClaireLyn 님 <하얀 사막 위 검푸른 하늘이 피어>






<하얀 사막 위 검푸른 하늘이 피어>

 - '염희'에 바치는 글
 
 
 
** 사실 '염희'의 진가는 작중 내내 단 한 번도 무타스 디무어의 시점이 나타나지 않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혹 욜란다나 톨레도 경의 시각이 섞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발렌시아 시점으로 진행되고, 따라서 독자들 역시 발렌시아가 보는 시선대로 염희를 읽게 되며, 그렇기에 더더욱 발렌시아의 숨겨진 분노와 슬픔과 절망에 먹먹하게 동의하게 되니까요.

** 그러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읽은 화자가 옥희의 시점을 걷어내고 어머니와 손님 간의 갈등을 읽고자 하듯, '염희'를 읽은 독자라면 무릇 디무어는 어떤 생각으로 발렌시아를 대했는지 보고 싶어하리라 생각됩니다. 다름아닌 제가 그랬으니까요.

** 따라서 이 글은 정말 말 그대로, 염희라는 완벽한 그림에 굳이 삐뚤삐뚤하게 덧붙이는 사족(蛇足)입니다. 덧붙여 염희를 읽은 제가 감히 작가님께 드리는 감상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묘사된 디무어의 모습은 제가 발렌시아의 시야를 벗겨내며 느낀 그녀이니, 다른 분들은 다르게 느끼셨을 수도 있겠지요.
 
 
 
 
 
 

 무타스 디무어는 자신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태생이 특별하기는 하다. 성조차 없는 미천한 노예를 너무나도 아낀 나머지 가문에 입적까지 시켜 아내로 맞은 남자의 유복녀라는 출생사는 정말로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덕분에 자유민임에도 미천한 태생이라 조롱받는 게 생활이었다는 것 역시 결코 일반적인 삶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의 특별함은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아니, 그녀의 주변 환경이 그렇기에 그 특별함은 더욱 도드라진 광채를 뽐냈다.

 그녀는 천재였다.

 노예의 태에서 태어났다는 것, 여자라는 것, 너무 어리다는 것, 무술에는 그다지 능하지 않다―실상은 그녀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지만―는 것, 그 외의 모든 논리를 단 한 번의 언급만으로 무자비하게 격파할 수 있는 유일의, 그리고 무적의 화살.

 그녀는 천재다.

 자뉘호의 예배당 위를 지나는 구름만 보고도 반-나티나모에 얼마만큼의 비가 어느 때부터 어느 때까지 내릴 지 계산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약과에 불과했다. 그녀를 천한 태라 비웃던 사촌들의 웃음소리만 듣고도 그들의 가장 내밀한 약점과 숨기고 싶은 비밀을 '읽어내어' 와레완의 가장 트인 광장에서 면박을 줄 수 있었다. 걸음걸이만 보고도 그의 직업과 국적과 신분과 고향과 성격까지 알 수 있다. 눈을 깜빡이는 횟수만으로 그의 몸 상태와 버릇과 취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천재였다. 남들이 미로에서 출구를 찾느라 헤메는 것을 비웃으며 단번에 지름길을 밟아가는 진짜 천재.

 그 사실을 자각했던 16개월의 그녀는 온 세상이 그녀를 향해 '소리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세계란 곧 정교하게 얽어놓은 태피스트리와 같은 것이었다. 모든 것에 원인이 있고 모든 것에 결과가 있다. 우연이란 없었다. 다만 멍청이들이 그 인과를 읽어내지 못해 우연 운운하는 것뿐이었다. 이렇게나 분명한 세계. 이렇게나 뻔한 세상. 그나마 그 모든 것들의 원인조차 16살에 전부 파악했다. 반-나티나모에 15개국 연합 사령관으로, 그것도 역대 최연소이자 여자로서는 최초로 총지휘관으로 천거된 그 순간. 그렇게 그녀의 세계는 완결지어졌다.

 무타스 디무어는 천재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세상은 하얀 사막이었다. 그 어떤 것도 땅 위를 뒹구는 하얀 모래알 이상으로 여겨지지 못하는, 그리하여 모두가 평등한 사막.

 모두가 열등한 땅.

 그곳에서 그녀 홀로 만족스러웠다.
 
 
 
 
 
 
 
 스물 네 살에 <전술>을 쓴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미 디무어가 총지휘관으로서 연합수도 반-나티나모로 격주마다 날려보낸 전장 보고서는, 그 간결하고 명석하며 세련된 문체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사람들의 열띤 성원에 힘입어 매번 책으로 엮어 발행되고 있었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 보고서가 적국이라 할 수 있는 중앙삼국―딤니팔, 라르디슈, 게외보르트―에서도 꼬박꼬박 발행되었고, 더군다나 한 쇄를 찍어낼 때마다 순식간에 절판된다는 점이었다. 그 단호한 문체를 새로운 책으로 얻을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도 좋다는 귀찮은 추종자들이 그녀에게 들러붙은 것은 당연한 수순에 가깝다.
 디무어는 귀찮았다. 범인들을 귀찮게 여겼고 동정했고 또한 경멸했다.

 전술은 그런 그녀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책이었다.
 
 열 여덟 가지 언어는 그저 데코레이션에 불과했다. 도저히 문장과 문장 간에 연결이 되지 않는 듯 툭툭 끊어지는 문체, 그러나 그 행간 사이에 숨겨진 의미를 깨닫는 순간 마치 해저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장면이 수면으로 떠오르는 듯한 명석함. 그것이 곧 디무어 자신이었으며 그녀가 누구보다도 만족스러워하는 자신의 영혼이었다. 그 가라앉은 장면을 하고많은 책 들 중 하필 <황혼>의 혈액으로 자아낸 건 그저 가벼운 유희 정도에 불과했다. 디무어가 이제까지 읽어온 그 숱한 책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괜찮다 싶었던 책이었으므로.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 자체로 그녀 스스로의 과시였다.
 이 세상의 그 누구가 <황혼>을 읽고 그녀처럼 이리도 훌륭히 소화해 <전술>로 재창작할 수 있으랴? 이 세상은 온통 머저리들과 둔재들로 가득한데. 누가 과연 이 책을, 14장의 논지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누가 과연 <나>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물론 언젠가 고까운 번역이 나타나리라 예상은 했다. 그러나 디무어는 그런 번역이 나타난다면 전력으로, 진심을 담아 힘껏 비웃어 줄 생각이었다. 열 여덟 가지 언어는 말 그대로 겉치레다. 높다고는 하나 넘을 수 없는 진입장벽은 아니었다. 고작 그런 장치를 위해 책 한 권을 썼으랴? 그러나 전술 14장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그녀의 하얀 사막이 그대로 담겨있는 그 부분을 제대로 해석할 자가 있을 리 없었다. 분명히 단어를 그대로 직역해 흩뿌린 무의미한 글자 나열이 될 것이고, 디무어는 그를 맘껏 비웃으며 어리석은 무지렁이들을 깔볼 생각이었다.

 <전술>은 곧 디무어의 자신감이었다. 나 홀로 사막 한 가운데 오롯하다는 자신감

 '이었다.'

 과거형이었다.
 어쩌면 현재형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현재형이었다. 그러나 이전과 똑같이 현재형으로 말하기에는, 디무어는, 다소 변수가 생겼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비록 온통 모래사막 투성이인 세계 한 귀퉁이에 작게, 손톱만한 크기로 자라난 검푸른 오아시스라 하더라도.

 분명 100%는 아니었다.

 '발렌시아 마조레 기지 얀 미라이예.'

 자신을 스승을 넘는 기분으로 상대하고 있다 말한, 딤니팔 군의 총사령관. 미라이예 공작. 적. 검푸른 머리카락에 감청색 눈을 한 애송이. 처음에는 인간이 아닌 줄 알았을 정도로 자신을 닫고 있었던, 그러나 실상을 까보니 어차피 자신과 동류였던, 맞수.

 가능하면 영원히 맞붙어보고 싶었는데.
 
 
 
 
 
 
 
 디무어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다호르티 회전의 완패로 자유민 지대의 오분의 일을 잃고 사순 간 부지휘관으로 격하당한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경쾌함이었다. 그녀는 한 다스의 호위병들이 감히 자뉘호의 예배당에 홀로 들어가겠다는 그녀의 뜻을 막지 못해 인수관 입구에서 멍하니 서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저들은 단 한 번도 그녀가 하고자 한 일을 막을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디무어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반-나티나모의 인수관 중앙 성소에서도 가장 앞쪽, 제단의 바로 옆에 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석상의 끝을 바라보았다.
 자뉘호의 신. 세상 만물 모든 것에 깃들에 그 뜻을 펼친다는 동부의 수호신.

 그녀는 신을 믿지 않았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계산하지 못한 바를 들이대는 신'을 믿지 않았었다.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열 여섯에 세상의 모든 이치를 '자각한' 디무어였다. 하얀 사막의 세계를 완성했다. 주변은 온통 뒷내용을 아는 이야기책으로 가득찼고, 그리하여 그 가치는 사막의 모래알로 추락했다. 그런 세계의 신, 신이라. 그래봤자 자신이 '읽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의 존재가치는 모래알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런 게 신일리가.

 신.
 전지전능한 신이라.

 디무어는 시선을 내려 제단을 응시했다. 자뉘호의 여사제들에게 준비시킨대로, 종이와 잉크, 그리고 그녀가 애용하던 끝이 날카로운 펜이 놓여져 있었다.

 
 "놀이는 끝났지만."

 
 디무어는 펜을 들었다. 잘 훈련된 악필, 규칙적으로 기울어진 글씨가 물살처럼 종이 위에 새겨졌다.

 
 "마지막 한 페이지를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오자도 없이 글을 끝맺었다. 잉크가 마르도록 내버려둔 채 그녀는 쭉 기지개를 폈다. 허공을 응시했다.

 하얀 사막. 온통 모래뿐이었던 세상. 모두가 열등하여 그녀 홀로 만족스러웠던 눈부신 백사(白沙). 그것 자체로 아름다워 완벽하였던 순백의 세계.

 
 그러나 그 위에 검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음을 내 몰랐겠는가?

 
 디무어는 깃펜을 내팽겨치듯 내려놓고는 종이를 한데 모아 반듯하게 접었다. 아무것도 적지 않은 종이 한 장도 같이 접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봉투에 넣고, 봉한 다음, 몸을 돌린다. 자뉘호의 여사제 한 명이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디무어는 서신을 휙 던졌다. 여사제는 익숙하게 그를 두손으로 받았다.

 
 "미라이예 공작이 이곳에 올 경우 전하라. 다섯 걸음 뒤에서."

 
 여사제는 가타부타없이 허리를 푹 숙여 예를 표하고는 몸을 돌렸다. 디무어 역시 몸을 돌려 다시 제단을 응시했다. 삐그덕거리며 예배당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왼쪽에 차고 있던 짧은 단검을 뽑았다. 가볍게 허공에서 한바퀴 돌렸다. 횃불이 검날에 반사되어 붉게 번뜩인다.

 스승이라.
 디무어는 단검 끝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렇다면 제자에게 마지막 숙제를 안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녀는 왼손으로 제단 위에 올려놓았던 다른 종이를 집어들었다. 연합에서 딤니팔 동부원정군에게 보내는 휴전 요청서였다. 그녀는 보지도 않은 채 망설임 없이 그 종이를 집어 던졌다.

 나는 내 하얀 사막으로도 충분했지만…….

 원형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종이는 횃불에 꽂혀 온몸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오므라들었다. 종이 타는 연기가 흐릿하게 천장을 박찼다. 디무어는 단검을 다시 반바퀴 돌려 역수(逆手)로 쥐었다.

 무릇 내 제자라고 자처하려면, 그 너머도 가 봐야지 않겠냐?

 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씩 웃었다.

 
 "검푸른 하늘이 되어서 말야."

 
 발렌시아 경.

 이 미덥잖은 제자야.

 
 목을 찌르는 데에 망설임은 없었다.
 
 
 
 
 
 
 
 이틀 후 548년 1월 23일, 반-나티나모의 무명(無名)이 보낸 급전이 딤니팔 동부원정군 총사령관 발렌시아 마조레 기지 얀 미라이예에게 도착했다. 첫 시작은 다음과 같았다.

 
 [근계謹啓. 동부원정 딤니팔 군 총사령관 발렌시아 마조레 기지 얀 미라이예.
 사안이 전장에 중하다고 판단하여 220년 공포된 달메로 칙령에 의거 폐하와 군의 총사께 동시 서간을 보냅니다.
 548년 1월 21일 새벽, 연합군 총지휘관 무타스 디무어가 반-나티나모의 인수관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단검으로 목을 찌른 평이한 자살이었습니다.]
 
 
 
 
 
 
 
 
 
 
 
 

** 이 글은 반비님께 드리는 팬픽입니다. 저, 클레어 린과 반비님 외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무단 게재를 금합니다. 물론 반비님은 원하시는 어디에 게재하셔도 상관없습니다 ^____^
 
** 뤼페닝이 막나가기 시작한 지금 믿을 건 먼저 가신 디무어밖에 없군요. 슬퍼라.. 게다가 조아라 독자분들은 저랑 생각이 많이 다르신 것 같아서 요즘은 댓글창 보기도 무서워요. 전 자카리랑 레아랑 기타 등등 엄청 좋아하는데.... (외려 주인공인 외르타와 발렌시아 호감도가 더 낮을 정도..-_-;)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