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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ClaireLyn 님의 팬픽




 
 열 두 살의 일이다.

 하늘로 날아갈 듯 두 팔을 벌린 채 선 여인상들의 손 끝에서 푸른 물줄기가 뿜어나왔다. 선명한 청동빛을 신경쓰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역동성. 라르디슈에서도 가장 고결한 존재들이 사는 생 로욜의 정원에 걸맞는 정교한 화려함은 귀족원을 드나드는 치들의 상투적인 찬사감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찬사가 와닿지 않았다. 하기야, 이런 곳에 '사는' 사람에게 그런 것들이 와닿을 리가 없다.

 "뤼 뤼페닝."
 
 붉은 머리칼의 소년이 나른하게 고개를 들었다. 담록색 눈이 힐끗 그를 부른 자를 응시했다. 고작 열 두 살의 아이가 갖기에는 지나치게 무감동한 시선이었지만 두 사람 다 개의치 않았다.
 라그랑주 뤼페닝 브느와 라르디슈 올 발루아. 한 당파의 수장 자리를, 그것도 놀랄만큼 오연하게 지탱하고 있는 이 나라의 제1태자. 그런 천재에게 이미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왕께서 생 로욜에 오셨습니다."
 "이제야?"
 "……의중을 몰라 여쭈는 제 무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왕께서는 예정 안에 도달하셨……."
 "그 멍청한 머리를 지탱해주는 네 목에 감사해라. 고작 육전대 편제다. 염일(念日)은 앞당기고도 남을 시기에 어찌 늦으셨나 묻잖나."
 
 보고하러 온 남자는 라르디슈의 혈맥과도 같은 라쥐모르 상권의 육전대를 '고작' 운운하는 태자의 단호함에 기가 질린 듯 했다. 물론, 군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로크뢰 1세에게는 확실히 긴 시간이 맞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직 성장기도 오지 않은 소년이 상기시켜서야 할 말이 없어지는 게 당연했다.
 아니면 그를 미리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멍청함에 탄식하거나.
 
 "……송구하오나 저로서는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치죄하십시오."
 "모자란 놈."

 뤼페닝은 감정없이 대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같지 않은 아버지라 해도 부자(父子)의 상봉 정도는 보여야 맞을 것이다.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궁내부원들이 태자가 이동할 기미를 보이자 쏜살같이 다가왔다.
 
 "왕께 간다."
 "보필하겠나이다, 전하."
 
 뤼페닝은 대꾸없이 걸음을 옮겼다.
 
 
 
 
 
 오스페다가 인간의 것이라 여겨지지 않는 경외감을, 숄렘 노트란트가 어두워질수록 더욱 빛나는 찬란함을 간직했다면 생 로욜이 지닌 것은 지나칠 정도로 섬세한 화려함이다. 정교하게 각을 세워 대칭을 이룬 정원수들과 인공미의 극치를 자랑하는 인공 호수 너머에 크림빛 대리석 조각상들이 굽어보는 생 로욜 궁이 있었다. 바닷가 백사장의 모래를 한데 모아 고운 체로 걸러내 펴바른 듯한 낙낙한 빛깔. 그 위로 깨알같이 새겨진 장식과 조각들이 한껏 제 멋을 뽐냈다.

 뤼페닝이 도착했을 때 왕의 행차는 정원을 거의 지나와 궁전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는 긴 행렬을 훑지 않고도 바로 로크뢰의 위치를 알아보았다. 자신도 물려받은, 그 타오르는 붉은 머리칼의 화염 같은 난폭함은 어디에 있던간에 자신이 여기 있다 증거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으니까. 뤼페닝은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변성기는 오지 않았으나 충분히 제 무게 실린 목소리였다.
 로크뢰는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동공과 홍채가 구분가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눈에 떠오른 것은 인식(認識). 마치 속 들여다보이지 않는 검은 늪 속에 몸 담그고 잠겨 있다가, 갑자기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것만 같은 순간적인 각성이었다. 마치 이제야 뤼페닝이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낸 것 같은.
 그 감정을 샅샅하게 읽어낸 뤼페닝은 답잖은 감정이 쓸려오는 것을 느꼈다. 빛바랜 양피지의 글씨처럼 희미한 수준이라 당황이라 부를만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라르디슈에서 왕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그와 그의 쌍둥이 남동생인 레스트왈이리라. 다름아닌 그의 자리를 뺏고자 하는 자들이기에 그렇다. 왕의 깔끔한 예법과 언사 속에 숨겨진 그 숨길 수 없는 난폭함과 폭력, 광기――어쩌면 그건 라르디슈 왕가의 피에 흐르는 본질과도 같은 것이기에. 그것은 마치 머리 위에 매달아놓은 칼처럼 영혼 속에 도사리고 있어, 라르디슈의 왕족들은 그 광포함을 제 손 안에 갈무리하는 법부터 먼저 배웠다. 양날의 검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경계하는 법을 익힌다.

 지금 로크뢰에게는 그 경계가 없었다.
 
 "그래."
 
 평소처럼 검집에 죄매놓은 칼날 같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마약에라도 빠졌다 깨어난, 그리하여 아직도 몽롱한 광기에 취한 것 같은 자제되지 않은 사나움에 뤼페닝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더 할 말이 있나?"
 "아니오. 귀족원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안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가라."
 
 부자 간의 대화라기에는 지나치게 냉막했지만 두 사람 다 그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본래 이런 사이기도 했거니와, 정확히 말하면 다른 것에 신경이 쏠려 있어 차마 주의를 쏟지 못했다는 것이 맞았다. 뤼페닝은 로크뢰의 정신줄을 앗아간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로크뢰는.

 일행이 움직였다. 말에 오른 로크뢰도 움직인다. 뤼페닝은 가볍게 한 발 물러나 로크뢰의 흑마가 으르렁거리며 멀어지는 모습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모장티에서 뭔가 있었다. 왕의 평정을 빼앗아 그 광기를 쏟아붓게 만든 무언가가――

 그 순간, 뤼페닝은 로크뢰의 뒤를 따르는 마차를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반쯤 열린 마차의 창문에 비친 여인을 보았다.

 아니, 여인이라기보다는 소녀였다. 긴 갈색 머리카락이 험한 벼랑의 바위 사이를 뚫고 자라나 제 가지 늘어트린 버드나무처럼 나릿나릿했다. 그늘진 갈색 눈동자와 하얗게 얼어붙은 뺨이 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죽기 직전 물가에 그러모아 구슬피 우는 백조의 노래처럼 가냘픈 선이 마차 그늘 아래 흩날렸다.

 본 적 없는 얼굴.

 그러나 뤼페닝이 무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마차는 지나갔다. 왕을 따르는 수행인들이 라르디슈의 태자에게 예를 올리고 지나쳐간다. 몸에 익은 예법으로 그 인사를 받아가며 뤼페닝은 생각했다.

 그 여린 분위기. 기껏해야 자신보다 한 두어 살 더 많아보이는 외모.

 왕에게 숨겨진 딸――그렇다면 그에게는 이복 동생이 될――이라도 있었던 건가 싶어, 그는 담록색 눈을 가만히 내리깔았다.
 
 
 
 
 
 "……뭐?"
 
 노루아는 놀랐다. 라르디슈의 1태자를 모시기로 한 이래, 그녀는 여태까지 '반문하는 뤼페닝'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뤼페닝은 한참동안 롬 카드를 이리 저리 쌓고 있었고, 그렇게 뤼페닝이 뭔가를 쌓고 있을 때는 말하는 사람 얼굴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을 노루아는, 아니, 그녀 뿐만이 아니라 뤼페닝을 따르는 자라면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쌓던 카드조차 내팽겨친 채, 그녀를 돌아보며 그가 묻고 있었다.

 "다시 고해, 노루아."
 
 태풍 일기 직전의 바람처럼 서늘한 목소리였다.

 "……폐하께서 게외보르트에 현 왕 막시밀리안 5세의 막내딸을 비로 달라 서신을 보냈습니다. 사실상 통고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귀족원이 반대가 심해 오늘 사자가 출발한 것으로……."
 "게외보르트의 막내딸?"
 "비달 프리드리히 무지크 외르타 틸 게외보르트 트리첸바. 올해 열 여덟입니다. 모장티에서 데려온 여인이 그녀죠."
 
 틸 게외보르트 트리첸바. 게외보르트의 트리첸바 왕조.

 뤼페닝은 잠시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 표정마저 물 아래로 밟아냈다. 다시 평소대로의 선명한, 그러나 약간 날카로운 무표정이 되돌아왔다. 그는 속으로 침잠했다.

 여동생이 아니었구나.

 그렇게 되뇌이고 뤼페닝은 속으로 실소했다. 미치겠군. 어디에 숨겨두었던 이복동생이었나 싶었을 정도로, 그리도 가냘픈 그 여자가, 이제 제 어미라? 어머니라고?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왕이 제 경계를 전부 부수고 광기를 쏟아부었다, 라.
 
 "게외보르트의 왕녀라니. 곧 내전이 벌어진다고 하지 않았나? 왕은 그 나라 내전에 발이라도 들일 생각인가?"
 "송구하오나……. 폐하께서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왕녀를 데려오신 듯 합니다. 본궁으로 가시면 전하께서도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미쳤군."
 
 뤼페닝은 그렇게 대답하고 책상 한 쪽에 쌓아두었던 서류철을 집었다.
 라르디슈에서 태자가 후계자 수업을 받는 것은 열 다섯 살까지. 그리고 열 한 살부터는 자신이 배운 부분에 대해 왕에게 보고하는 것을 의무로 한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뤼페닝은 머릿속에서 일정 몇 개를 정리하고는 가볍게 일어섰다.
 
 "본궁으로 가겠다."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굳이 눈으로까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본궁을 울리는 비명과 울음과 욕설. 알현실에서 기다리던 뤼페닝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날카로운 고함이 궁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남부 쥘브렝 어, 게외보르트 특유의 맑은 경음이 강하게 섞인 공용어와 게외보르트 왕실 언어――마지막은 추측이다. 뤼페닝도 아직 게외보르트 왕실 언어까지는 완벽하게 익히지 못했으니까. 수없이 바뀌어가며 울부짖는 여인의 목소리에 서린 분노가 섬찟하다.
 퍽, 하고 무언가 둔탁하게 벽을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뤼페닝을 마냥 기다리게만 할 수도, 그렇다고 왕의 명을 어기고 뤼페닝의 당도를 고할 수도 없는 궁내부원들의 표정은 가히 볼 만한 것이었다. 뤼페닝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기다리다 앞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회중시계를 꺼냈다. 끝을 누르자 맑은 소리를 내며 뚜껑이 열렸다. 정교하게 세공된 검은 시침과 분침이 또렷하였다.
 도착한 이후 반 시진 정도 지난 듯 하다.

 그리고 그 반 시진 내내 저리했다.

 정말 다들 정신 나갔다.
 
 "폐하께서 바쁘시다니 할 수 없겠군. 서류철을 두고 갈테니 친전으로 왕께 전하라."
 
 울 것 같던 궁내부원들의 표정이 한 시름 놓았다는 듯 밝게 변한다. 뤼페닝은 몸을 일으키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알현실을 나와, 본궁의 긴 복도를 걸어, 오로지 왕족들만이 오갈 수 있는 중앙 문이 열리고――
 
 "들었냐?"
 
 문 기둥 옆에 기대고 선 소년이 이쪽을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뤼페닝과 같은 붉은 머리칼에 라르디슈 특유의 섬세한 턱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달리 지나치게 활기찬, 그리하여 마치 천박한 가면을 쓴 듯한, 갈색 눈.

 라르디슈의 제2태자, 라그랑주 레스트왈 비제 라르디슈 올 발루아.

 뤼페닝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들었지."
 
 레스트왈은 뤼페닝과 똑같이 웃었다.
 
 "대단하지?"
 "정신 나갔더군."
 "아버지가, 아니면 저 여자가?"
 "둘 다."
 "나도 동감이야."
 "네 놈이랑 같은 생각을 할 날이 오다니 기가 막힌다."
 
 레스트왈은 기둥에서 등을 떼고는 양 손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마치 광대가 웃듯 웃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하다고. 아버지를 저렇게 미치게 만들다니. 살면서 이렇게 대단한 일은 본 적이 없어."
 "고작 열 두 해 산 주제에 입만 살았군."
 "뻐기기는. 너도 나랑 동갑이야."
 "너처럼 천박하진 않다."

 옅은 초록색 눈 위로 떠오르는 건 숨길 기색이 없는 경멸이었다. 레스트왈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뻔뻔한 얼굴이라니, 땅바닥에 갈려 봐야 정신 차리겠네. 가식적이고 재수 없는 놈."
 "시끄러우니까 작작하고 입 닥쳐."
 
 뤼페닝은 말을 자르고는 레스트왈이 기대고 있던 기둥의 반대편으로 가 등을 댔다. 살짝 위쪽을 올려다봤다. 대륙에서도 남부에 위치한 라르디슈, 생 로욜의 맑은 하늘이 구릉이 적은 평원 너머로 까마득히 펼쳐져 있었다.

 이리도 좋은 날씨에, 왕은 여자를 구타하고, 여자는 왕에게 반항하고, 아들들은.

 "로크뢰 1세의 미친 집착을 받는 여자라."
 "이용할 수 있겠지?"
 "충분히."
 "몇 년 내에?"
 "못해도 10년 안."
 "나도 그래."
 
 태자들이 스물이 되기 전에 왕은 죽을 것이다.

 뤼페닝은 시선을 내려 그를 보았다. 레스트왈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녹색 눈과 갈색 눈이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죽여줄게."

 레스트왈이 푸르게 웃었다. 가면이 살짝 벗겨지고 갈색 눈 위에 선연한 증오와 광기가 어렸다. 뤼페닝은 기둥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몸을 돌렸다. 계단을 내려가며 말한다.

 "누가 할 소리를."

 그리고 그 미래의 어느 날, 남는 것은 한 쪽 뿐이리라. 적(赤)이든 청(靑)이든.

 
 아들들이 제 아비의 죽음을 논하던 그 날, 하늘은 시리도록 맑았다.
 
 
 
 
 
 
 
 
 
+ 생 로욜의 묘사는 베르사이유 궁을 생각하면서 했어요.
 
+ 외르타 게외보르트 시절 본명 찾느라 나담 전체를 정주행했네요..;; 1.5부에 있었을 줄이야.
 
+ 쓰고보니 뤼페닝과 레스트왈이 열 두 살 주제에 너무 조숙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음.. 걍 넘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