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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담벼락

오리우엘라 예거와 딤니팔 분단 썰 (3)



이야기는 이제 게외보르트로 돌아갑니다. 이때 그들의 왕은 사이페르트 1세였습니다. 막 즉위한 신참내기에요. 그리고 그의 형은 바라이스 큘 일딘 노이레 도르프슈투벤입니다. 예. '살아' 있지요. 이 이유에는 좀 여러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이 딤니팔을 아예 뿌리부터 갈라 놓기에 아주 좋은 시점이라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바라이스가 여자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점이에요. 

첫 번째는 당연한 일이지요. 이전에도 선례가 있었거든요. 우리 이제 친선관계를 맺어 볼까 하면서, 딤니팔은 게외보르트에게 170년 즈음(아이고 배알도 없지요. 게외보르트 건국시기는 154년입니다.) 국혼을 요청했습니다. 물론 잉그레 측에선 뿌리도 없는 게외보르트의 태에서 태어난 아이를 후계로 삼을 생각은 없었고요. 후처였지요.(이미 굴라르모 1세는 태자로 책봉되어 있던 상태입니다.) 게외보르트는 서쪽을 향한 영토확장에 바빠서, 더군다나 그때까지는 형제몰살이 그리 큰 전통이 아니라서, 그냥 원하는 딸 하나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덜컥 딤니팔 왕실의 아이가 나오고 말지요.

그 아이가 태어날 때 즈음의 게외보르트는 다음 대 왕계를 위한 권력 암투가 엄청나게 심한 상태였습니다. 다 죽이고 형제가 단 둘이 남았을 때. 딤니팔에서 누이의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들린 겁니아. 아, 비상입니다. 이전까지는 그리 크게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현실로 닥치니 이건 뭐 안 될 일이지요. 그래서 그 둘은 손을 잡습니다. 손윗사람인 형을 왕위에 올리고, 아우는 일딘이라는 특수 직위로 물러나서 국정에 모든 협력을 다하는 방식으로요. 이 경우 아우는 금록에서 완전히 말살됩니다. 왕족이 아니게 되고, 아예 새로운 가문이 하나 나오는 거죠. 아무튼 이런 방식으로 게외보르트는 대담하게도 딤니팔의 왕손을 죽였습니다. 야만인(!)답게 아주 증거도 확실하게 두고요.

잉그레의 노여움으로 즉각 솔림와르 전쟁이 발발했지만, 게외보르트는 초반부 딤니팔을 아주 초전박살 냅니다. 그리고 5년의 마지막 즈음, 간신히 간신히 승기를 회복한 딤니팔에 밀려 다시 얌전히 원래 국경으로 돌아가지요. 딤니팔도 상처뿐인 승리였습니다. 그들이 요구할 수 있었던 건 기껏해야 배상금 몇 푼과, 게외보르트의 왕손은 딤니팔의 왕계에 편입되었을 때 아예 새로 쓰여진다, 결코 게외보르트의 무엇이 아닌, 오롯한 딤니팔의 손이다 라는 맹세뿐이었어요. 물론 딤니팔의 왕이 다시는 게외보르트의 왕녀와 결혼할 일이 없으니 이따위는 뭐 쓸모없는 오금박기지요.(전쟁 뒤 딤니팔의 왕비는 유폐되었습니다. 자살했고요.) 

좌우간, 이런 특수한 케이스 - 라지만 따지고 보면 바로 전 대랍니다 - 가 있기 때문에 사이페르트 1세는 바라이스를 용납합니다. 딤니팔이 정으로 가른듯 쪼개져 있는 상태잖아요?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물론 이처럼 유한 대처는 게외보르트 건국 초반부라서 성립될 수 있었던 거랍니다. 221년 이후 현 551년까지 '일딘'은 딱 한 번 더 있었거든요.) 

사설이 길었네요. 그리고 두 번째, 바라이스는 여자를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아니.. 남색가라 그런 것은 아니고요. 관계는 맺는데 대하는 모양이 꼭 망나니 중 상 망나니에요. 조금만 눈에 거슬리게 군다 하면 자기와 잔 여자라도 혀 베고 코 베고 난리가 아니지요. 물론 이때는 게외보르트가 아직까지 유목민의 전통을 못 벗고 좀 야만적이었던 당시지만, 그래도 저따위 품위 없는 왕족은 말이 안 되거든요. 참고로 이쪽이 형입니다.. 그나마 좀 정상적인 사이페르트 1세는 어렸을 적부터, 여성 혐오에 시달리는 형을 뜨악하게 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라이스가 어머니의 외도를 보고 자라 그런 것이었지만, 사실 사이페르트 1세도 (친동기입니다.) 어머니의 외도를 모른 것은 아니었거든요. 직접 보고 자란 것과 들어 아는 것의 차이랄까요. 좌우간 그래서 바라이스는 근본적으로 여성혐오에 시달렸고, 일찍 결혼한 자기 부인을 되도 안 되는 의처증으로 살해(!)하는 바람에 이제는 다들 딸 주기를 대놓고 꺼릴 정도였습니다. 왕의 장자인데요... 물론 왕의 장자기 '때문에' 저 미친 맹수를 길들이는 신데렐라를 꿈꾸며 다가서는 여자도 많았지요. 당연하지만 정도를 넘으면 똑같이 다치고... 미친놈은 계속 미친놈으로 남았습니다. 

사이페르트 1세는 이런 자기 형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저놈은 아마 여자가 자기 아이를 봤다 해도 여자랑 아이를 같이 죽일 놈이에요. 내 아이가 아닌데 속여 먹는다고. 그래서 아우는 애초에 형의 대가 이어질 거란 허무맹랑한 상상은 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첫 번째 이유도 있고요. 바라이스는 체사레 뺨을 여러 대 때릴 수 있을 정도로 천재적인 군사였거든요. 마치 노트란트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형과 거래를 합니다. 네가 자식을 못 남길 거란 사실을 안다. 세력도 나보다 적고. 그러니 왕은 말도 안 되지. 그런데 죽기는 또 싫지? 그러면 나를 위해 봉사해라. 살려주마. 바라이스는 냉담하게 동의합니다. 이 사람은 여자 일만 빼면 현실적이거든요.

사이페르트 1세는 즉위해서 무니시팔과 손을 잡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총사를 맡은 자는 바라이스. 그는 만반의 준비를 기해 적절한 시기에 체사레의 딤니팔 군을 몰살시키지요. 이게 222년입니다. 사실 바라이스는 전장에서 설친다는 미친년(!)을 잡고 싶어 난리가 났어요. 여자가 왕이라는 것도 경멸스러울 일인데 감히 전장에서 칼을 든다고요? 그의 눈에는 도무지 제정신처럼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를 그리 천방지축(!) 날뛰게 두는(!) 체사레의 경솔함(!)도 경멸해 마지 않았고요. 

체사레는 몰살 이후 다시 게외보르트와 조우한 전투에서, 처음으로 바라이스와 마주합니다. 사실 처음 칼을 댔을 당시에 그는 바라이스가 바라이스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가 차려입은 게 일반 기사와 별반 다르지도 않았거든요. 그나마 망토에 가려진 그의 등 부분 갑옷이 검었지요. 체사레는 막상막하로 싸우다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아챕니다. '도르프슈투벤?' 바라이스의 얼굴은 이미 훤히 열려 있었습니다. 그는 웃지도 않고 말합니다. '이제야 알아 보다니 너도 알 만하군.' 체사레는 그 순간 저 남자에 대한 분석을 마칩니다.

바라이스는 물론 체사레와 비슷하거나, 가끔 영감이 비칠 때에는 그를 뛰어넘는 전술 감각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나 정치에서는 턱없이 모자라요. 때문에 자신이 그 단 마디로 읽히고 말았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합니다. 물론 알았다 한들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 테지만요. 바라이스는 이어 말합니다. '왕국 제일 가는 창년의 기둥서방다워. 훌륭하다.' 체사레는 멀뚱히 그를 바라봅니다. 바라이스의 주변에서는 게외보르트의 기사들이 킥킥대고 있고, 체사레의 주변에서는 화가 나 주체를 못하는 딤니팔 기사들이 있는데, 체사레만은 너무도 고요합니다. 그는 저자가 저것을 사기 진작용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려요. 진심인 겁니다. 체사레는 그 얼토당토 않은 진심을 분석하다, 문득 그가 여성혐오로 아주 악명이 높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체사레는 어쩐지 어처구니가 없고, 아니, 사실 우스꽝스럽기까지 해서 순간적으로 픽 웃습니다. 애도 아니고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 그 모욕에 마땅한 대가로 바라이스는 친절히 칼침을 제공합니다만, 체사레는 여전히 미소를 떨치지 못한 채로 그를 막아냅니다. 

'웃긴 일이 없는데.' '미친놈.......' 예. 미친놈은 체사레가 한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절대 살벌한 기색은 아니고요. 웃음을 못 참고 흘려가며 내뱉은 농담 느낌이에요. 그 어감 탓에 한 일 초 간은 아무도 체사레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바라이스가 체사레를 비웃지요. '상대의 총사에게 그따위로밖에 예를 못 차리나?' 체사레는 웃음을 싹 지웁니다. '그러는 너 역시 우리의 왕을 대하는 말투가 썩 훌륭하더군.' '그년은 왕이 아니지.' '첫째로,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년 소리를 입에 올리면 죽는다.' '꼴에-' '둘째로, 예거의 자질에 대해 논해도 죽는다.' '어차피 서로 죽이려 선 전쟁터지. 아무튼, 그년은 자격이 없고.' 체사레는 대화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는 다시 칼을 듭니다. 자신과 전쟁을 쪼개는 자가 누군가 해서 나름 기대했는데 이래서야 원 실망스럽기 짝이 없어요. 한심합니다. 그 와중에 바라이스가 말하지요. '그년과 결혼한 건 네 씨를 남길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로군.' '시끄럽다.' '그년이 어디서 누구와 놀아나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 권력까지 쥐었겠다 아주 발라당 까졌겠군. 어느 시장 논다니에게나 다리를 벌리고-' 체사레의 칼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바라이스는 그가 자신을 죽이려는 목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제 얼굴을 찍어버리려는 기세로 휘둘렀다는 사실을 알아요.

바라이스 역시 그런 체사레가 한심합니다. 여자 하나에 열을 내기가 저 모양이에요. 바보 아닙니까? 분명 배반이 필연인데 저 얼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정말 믿는 것 같아요. 정말 애정을 가졌고, 정말 존경하는 거에요. 미쳤습니까? 배신의 짐승인데다 열등하기까지 한 '여자'를요. 바라이스는 말은 험하지만, 그 말의 어조만큼 흥분한 것은 아닙니다. 한 마디 한 마디 진심이라도 '신념'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욕설은 제법 담백해요. 감정이 담겨져 있지 않은 겁니다. 바라이스는 그처럼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납니다. '그년한테 네 자식을 보길 바랐다면 정말 넌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다. 안쓰럽군.' 체사레는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얼굴로 섰습니다. 어이가 없기는 한데 이미 그 표정은 많이 지었고요. 화를 내고 싶은데 저놈이 너무 진심으로 저렇게 믿는다는 사실에 기가 막혀서 그렇게 노엽지도 않아요. 애 하나의 천방지축을 보는 느낌이랄까요. 

그날 전투는 어찌어찌하여 끝이 납니다. 그리고 전투가 종결된 그 다음날 아침, 체사레는 잉그레에서 급신을 받습니다. [예거께서 회임하심.] 예. 지금은 222년입니다. 이 '회임'된 아이는 아레아고요. 체사레는 도저히 날짜가 맞지 않는 듯하자 못내 의심쩍은 얼굴로 왕도에 갑니다. 그리고 벌어진 사태는.... 저번에 말씀드렸지요. 그가 딱히 바라이스의 말을 속에 담았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아예 잊었습니다. 다만 예전부터 약간이나마 있던 집착과 불안이 갑자기 불 붙은듯 피어난 것뿐입니다. 

좌우간, 그처럼 이혼소동을 벌이고 난 뒤 체사레는 다시 전장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인듯 바라이스가 버티고 있습니다. 체사레는 그제야 그의 말을 기억하지요. 기억하고, 그 뒤 마주칠 때마다 그런 소리를 듣습니다. 아이와 핏줄 문제에 관련된 욕설이요. 체사레는 한 번은 친절히 모든 남자가 너처럼 강박적으로 핏줄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라 합니다.(이건 체사레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에요. 그가 집착한 것은 자기 핏줄이 아닌 오리우엘라니까요.) 그리고, 예거께서 만일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흥미가 동하신다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좋은 일이라고 말하지요. 왕의 핏줄은 많이 남으면 남을수록 좋으니까요. 물론 개소리입니다. 당시 체사레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몰려 있었는지...

하지만 의외로 체사레가 전쟁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오리우엘라에게 가, 진실을 말하라고 화를 내지 않은 것에는 바라이스의 공이 컸습니다. 그가 극단에 서서, 그쪽으로 쓰러지려는 자신을 밀어주는 느낌이었거든요. 자기가 A라고 생각해도 AAAAA를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과 같은 이치에요. 더군다나 체사레는... 음.... 그는 물론 오리우엘라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오리우엘라를 의심하면 죽일 예정입니다. 그런 복잡미묘한 감정이에요. 따라서 바라이스가 계속해서 그녀를 모욕해대자 체사레는 외려 더 냉정을 차리게 됩니다. 그렇게 의심하는 와중에서도요. 

결국 일은 잘 처리되었지요? 체사레는 오리우엘라의 손바닥을 찌르고, 벌벌 떨며 빌고, 아이를 받아들이고, 재결합 기념으로 알론조 캄비에 다녀오는 방식이요. 체사레는 알론조 캄비에서 떠날 때 즈음에야 아, 전쟁터에는 바라이스가 있었지 하고 떠올립니다. 오리우엘라에게 전장에 가시지요 약속할 때에는 재결합의 꿈과 희망에 부풀어 저딴 건 정말 사소한 사항처럼 보였거든요. 미처 제대로 따지지를 못한 거에요. 체사레는 머리가 아파집니다. 오리우엘라는 물론 포로로 잡혔을 때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묵계로 협의된 사항이고, 만일 죽는다고 해도 스트레파르(무니시팔의 수도)에나 가서 처형당하겠지요. 그런데 암만 봐도 바라이스는 그 자리에서 이 여자를 윤간하라고 시킬 만한 무뢰한인 겁니다. 농담이 아니지요. 최소한의 품위도 지켜 주지 않을 것 같은 거에요.

그래서 체사레는 또 슬금슬금 왕도에 가 계시는 게 어떠냐 설득합니다. 물론 오리우엘라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고요. 그는 자기 전적이 있어 어떻게 언성을 높이질 못합니다. 다만 그래도... 이렇게 계속 딴지를 걸다가 침실 엄금령을 받고 쫓겨나지요. 체사레는 오리우엘라에게 자신이 반대하는 진짜 이유를 밝힐 마음이 없습니다. 적군 총사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듯합니다 라는 말은 물론 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예거께서 여성이기 때문에 그의 대우가 두려워 출전을 막으려는 겁니다, 이건 어떻게 입이 찢어져도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요. 그래서 그는 떨떠름한 채로 부부동반으로 전장에 도착합니다. 

오리우엘라는 물 만난 고기처럼 펄떡펄떡 기운찹니다. 체사레보다 더 중앙에, 더 다리를 꼬고 앉아서 엄청나게 정력적으로 일에 참여하지요. 아니, 참여라는 말은 옳지 않겠군요. 원래 그녀의 일이니까요. 좌우간 체사레는 약간 어정쩡한 상태로, 오리우엘라는 흥분해서 첫 전투를 맞이합니다. 오리우엘라는 전투 전날 직접 출전하는 문제로 체사레와 싸웁니다. 물론 체사레가 졌고요. 그가 계속해서 그녀의 곁을 수행한다는 조건을 건 뒤에야 어떻게 타협이 이루어졌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전투가 개시되고, 급박한 가운데 네 시간이 지나고, 비등비등한 전세 속에서 오리우엘라는 바라이스와 마주칩니다. 오리우엘라 뒤에는 체사레가 바짝 긴장한 채 지키고 있었고요.(오늘 하루종일 그녀만 악착같이 따라다녔습니다.) 오리우엘라는 딤니팔의 태양이기 때문에, 항시 얼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투구는 중요부위를 가릴 정도로만 쓰고요. 바라이스는 그녀의 둔탁한 금빛 투구를 보자마자 저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립니다. 오리우엘라는 체사레가 말리기 전, 일반 기사 차림의 바라이스를 가볍게 한 번 찔러 봅니다. 바라이스가 무언가에 얼어붙은듯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거든요. 체사레는 금방이라도 앞으로 나설 준비를 하며 칼자루를 꽉 잡습니다. 오리우엘라가 모자라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약력의 차이란 것이 있거든요. 아무튼 잠깐, 소란 속의 정적이 바라이스를 덮친 듯했습니다. 그의 적나라히 드러난 입매도 뻣뻣히, 눈매도 딱딱하게, 온 얼굴이 경직된. 오리우렐라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자기 뒤로 쟤는 뭐냐는 반응을 보입니다. '바라이스 큘...... 일딘 노이레 도르프슈투벤.' 

오리우엘라는 못마땅해 하던 얼굴 그대로 다시 바라이스를 바라봅니다. '총사인가? 헌데 왜 그런 복장인가?' '본시 스스로를 뽐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세히 보시면 색이 검습니다.' 체사레는 뒤에서 할 말을 잃습니다. 창년이... 뭐.....라고... 하던데...? 어이가 없지요. '아? 그렇군. 적장 간의 대결을 주선하려면 내가 비켜야 하는 것인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미라이예 공과 저는 이미 허다히 마주본 사이입니다.' '그래서, 나랑 붙자고?' '폐하께서-' '예거.' '예. 예거께서 바라신다면 조건을 걸고 칼을 들고 싶습니다.' '무례한 놈이로다. 그래서, 무엇을 걸게?' 무례하다 하지만 오리우엘라의 목소리에는 흥미롭다는 기색이 있습니다. 물론 게외보르트는 증오스럽지요. 하지만 이미 전장이라는 이 사선 위에 선 이상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목숨으로만 목숨을 잴 수 있으니까요. 바라이스는 말합니다. '예거를 거십시오.' 

'나를?' '예.' '설명하지.' '저는 당신이 욕심 납니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남편이 옆에 있는데 고백을 하다니.' '본시 염치가 없습니다.' '그런 것 같다. 헌데 아쉽게도 그대의 부탁은 들어줄 수가 없다. 예거라는 말의 진정을 모르는 것인지? 나는 한 여자나 사람이기 이전에 딤니팔의 왕이다. 농담으로 여길 테니 이만 접지.' '위명 자자한 예거를 뵙고 차마 빈 손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농으로 여기셔도 됩니다만, 제가 예거께 감히 실언을 할 만큼 예거의 고귀함에 감명 받았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지. 그럼 지금은...' '예. 미라이예 공도 저와 칼을 들 마음이 없는 듯하니 오늘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칼을 들 마음이 없기는요.. 죽일 기세로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체사레는 처음에는 저게 농담인지 비아냥인지 무엇을 위한 초석인지 알아내기 위해 무진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듣다 보니 가관입니다. 그중 어떤 것도 아니거든요. 진심 같아요, 심지어. 자기 앞에서 웬 무도한 한량이 아내한테 추근대는 꼴을 보니 속이 남아나지를 않겠지요. 그렇다고 대화를 칼로 끊으면, 아마 돌아가서 오리우엘라의 호된 꾸지람을 들을 테고요. 도대체 바라이스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니 무슨 속셈인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바라이스는 체사레에게는 한 번도 하지 않은 잉그레의 예를 표한 뒤 홀로 홱 돌아갑니다. 단신으로 들어왔나 봐요. 

오리우엘라는 체사레를 돌아보며 짧게 웃습니다. '유쾌한 친구로군. 헌데 체사레, 도대체 여성 혐오라는 말도 안 되는 모함을 왜 씌운 건가?' 사실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믿을 턱이 없지요. 체사레 자신도 그 둘이 잘 매치가 안 되는데요. 체사레는 방금 전 저 사람이, 오리우엘라에게 여기저기 다리를 벌리는 창년에 기타 등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퍼붓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납득시켜야 하나 고민합니다. 그리고 미라이예들이 거의 대부분 그렇듯이, 멍청하게 직구로 던지지요.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이가 아니고, 본국에서도 이러저러한 평판이고, 심지어 예거께도 이러한 욕설을 했다. 물론 오리우엘라는 한 번 웃고는, 체사레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갑니다. '당신은 질투를 참 괴상하게 하는군.' 체사레는 터덜터덜 그녀를 따라 들어오지요. 사실 저토록 깍듯하고 능청맞은 태도에 자기의 진실이 먹힐 거라고는 그도 별로 생각지 않았거든요. 

그는 그녀를 설득하기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이 경계심을 높이기로 합니다. 저놈의 자식이 무슨 이유로 자기 왕에게, 자기 아내에게 추근덕대는지 모를 일이니까요. (사실 일반적인 적군이었다면 체사레나 오리우엘라의(이건 심증이 너무 뻔하지요) 동기살해를 가장 먼저 책 잡았을 테지만, 바라이스는 사실 그 모욕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항상 있는 일이니 뭐가 잘못된지도 잘 몰랐거든요.)

사실 바라이스는 오리우엘라에게 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 그는 그녀를 본 찰나, 순간적으로 자기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생김새나 분위기나 전부 그리 닮지 않았는데, 그 순간, 바라이스에게 와 닿는 직감이 그러했어요. 그는 그것을 느낀 순간 오리우엘라를 죽일 마음이, 언사로 모욕할 마음이 싹 사라지고 맙니다. 그보다는, 굴복시켜야겠다는 호승심이 일어요. 좀 마이너스적인 방향으로요. 저 찬란함을 짓밟아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찢어발기고 싶습니다. 제 아래 깔고 비명 같은 애원과 굴종을 듣고 싶어요. 바라이스에게 오리우엘라가 가지는 의미는 고작 이 정도입니다. 아, '고작'이 아니겠군요. 이 정도면 그의 절반 이상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아무튼 그는 그런 들쩍지근한 감정으로 오리우엘라를 마주봅니다. 

우선 인정해요. 왕의 그릇이다. 그에게 여자란 감히 뛰어넘을 수 없었던 제 어머니와 기타 잡것으로 나뉘였기 때문에, 그녀를 어머니와 동급으로 놓자 그제야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 있게 된 거에요. 예. 오리우엘라는 체사레가 반했듯 굉장한 사람이지요. 섬광을 냉각시켜 세상에 둔듯 강렬한 생김새이기도 하고, 칼도 여성의 것이라기에는 이미 임계치를 넘었고요. 아마 이 전술에도 절반은 참여했을 텐데, 역시 훌륭했지요. 바라이스는 그녀를 인정한 뒤, 자기 양심상의 선전포고를 합니다. 언젠가는 짓밟아 제 아래 버러지처럼 두리라는 선전포고요. 이게 바로 아까 바라이스가 갑자기 유해진 이유였습니다. 네가 욕심난다는 말은 정확히 전달했어요. 예법에도 딱히 어긋난 것이 없었고요. 바라이스는 자신이 반드시 그럴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돌아오는데, 이 집착인지 증오인지 모를 것이 자꾸만 머리에서 맴돌아요. 오리우엘라의 혈색 좋은 얼굴과, 그 뺨에 후드득 묻은 피와, 두텁지도 가늘지도 않은 건강한 팔 다리, 무언가 내려보는듯 도도하지만, 동시에 사람을 마주보는 시선, 너무도 차가워 살이 붙어버릴 것만 같은 벽안, 몇 가닥 보이지 않음에도 찬란한 금발. 그리고 그녀를 제 품에 감싸듯이 데리고 가는 체사레는 덤입니다. 바라이스는 마지막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도 이상으로 짜증이 납니다. 그는 체사레를, 오리우엘라를 정복한 남자 정도로 보고 있거든요. 하하하....... 그는 부부의 동등한 관계를 - 아니 사실 여기는 여성 상위지만 - 생각하기에는 상상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선임자? 자신이 밀어내야 하는 대상이 바로 선정복자인 체사레라고 생각한 겁니다. 마지막에 체사레가 오리우엘라에게 찔끔하는 것만 봤어도 이런 얼토당토 않은 오해는 하지 않을 텐데.... 참고로 당시 바라이스는 서른이었습니다. 체사레가 서른다섯이고요. 

바라이스는 이제 확실한 목표가 생기자 더욱 착실하게 전쟁에 몰두합니다. 오리우엘라를 잡아다, 제 부속물로 만드는 것. 어차피 무니시팔은 이제 자기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으니 여자를 내놓으라 하면 내놓을 수밖에 없거든요. 죽이든 말든 그건 바라이스 자기 재량이고요. 그리고 그는 그 다음 전투에서 오리우엘라가 출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나는 도중, 전투 초반부터 자기를 향해 오는 적 총사를 발견합니다. 흰 갑옷. 

체사레는 달려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칼집으로 그의 뺨을 후려칩니다. 너무 의외의 동작이라서 주변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어요. 몇 초 뒤 다들 버럭 일어나 우왕좌왕했지만 그건 또 체사레를 따라온 딤니팔 기사들이 맡았고요. 바라이스는 맞는 순간 어금니에 힘을 꽉 주고, 할 수 있는 최대한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기에 잇몸만 박살이 나고 나머지는 멀쩡했습니다. 그는 투구까지 충격이 전해져 어지러운 이마를 짚고는 황당하다는 듯 체사레를 바라봅니다. '미쳤나?' '예거께 무슨 속셈인가.' 아, 자기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댄다고 노여운 모양입니다. '말했잖아.' '그런 헛소리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럼 더 해 줄 말이 없군.' '너는 내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싫은데.' '예거께 함부로 방자한 언사를 놀리지 마라. 네가 감히 말을 붙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래놓고 밤에는 침대에서 깔고?' '도대체가.......' '맛있나?' '너는 '감히'라는 말의 뜻을 모르나? 그 이전에, 왕실의 일원된 자로 예의를 배워먹지도 못한 건가?' '나는 왕족이 아니다.' '국왕의 형제로 안다.' '아니, 나는 도르프슈투벤이지, 트리첸바가 아니지.' '눈 가리고 아웅할 셈인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니 넘어-' '중요하지. 내가 트리첸바였다면 엄중한 왕실 계율상 딤니팔의 예거를 내 여자로 들이지 못했을 테니까.' 체사레는 귀를 의심합니다. '뭐?' '내가 트리첸바가 아닌 도르프슈투벤이기 때문에 예거를 내 여자로 들일 수 있다 말했다.' 

체사레는 우선 주위를 확인합니다. 개소리를 듣는 자가 개 이외에 또 있으면 안 되거든요. 다행히 다들 싸우느라 바쁩니다. 그는 다시 바라이스를 돌아봅니다. 으르렁거리듯 말하지요. '이번 전투는 내가 이기겠군.' '왜?' '적군의 총사가 정신이 나갔으니.' '안 나갔다. 다시 한 번 말해주랴?' '다시 한 번 말하면 이번에는 턱뼈를 부숴놓겠다.' '과장은.' 체사레는 답하지 않고 칼을 뽑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팔이라도 하나를 베어 두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뭐라 비아냥대는 바라이스를 무시하곤, 즉각 칼을 대지요. 그들은 여러 번 격렬하게 쩡쩡 부딪히고, 수 분 간의 싸움 끝에, 체사레가 먼저 우위를 점합니다. 보통 이쯤 되면 주변이 자기 수세기 때문에 대충 하고 물러나지만, 그는 이번만큼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죽여버릴 예정입니다. 태어나서 이 정도로 집중해 본 일이 드물 정도로, 그는 바늘 끝처럼 신경을 곤두세운 뒤, 간신히 바라이스를 몰아세웁니다. 바라이스는 칼을 휘두를 타이밍을 놓쳐요. 그래서 한 순간, 확 열린 품 사이로 체사레의 칼, 알라이녜가 아귀처럼 달려듭니다. 이번에는 못 피했어요. 잉그레의 칼이라 철을 뚫습니다. 바라이스는 왼쪽 배를 푹 찔린 뒤 말을 뒤로 물리지요. 거의 순간적인 판단으로. 체사레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자기 칼을 회수합니다. 칼집에 넣지는 않아요. 그는 낮게 말하지요. '감당할 수 없는 이를 넘보지 마라.' 바라이스는 왼쪽 배를 짚고, 비웃습니다. 상태는 사실 좀 심각합니다. 지금 즉각 돌아가서 지혈하지 않으면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체사레는 아예 끝장을 보고 싶어 하지만, 슬슬 포위될 기미가 보이자, 주변 기사들을 이끌어야 하는 의무가 있어 떠납니다. 이 정도면 경고는 충분하다고 여겨요.

그날 저녁 체사레는 총사령관의 탁자 위에 칼을 두고는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서 있습니다. 바라이스를 찌른 이후 다시 일선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 전투는 체사레의 완승이었기 때문에 칼에는 딱히 피가 덧칠될 일이 없었습니다. 즉슨, 제 앞에 있는 피는 바라이스의 피라는 거지요. 대각선 위로 내찔렀으니 아마 늑골이 부러졌을 겁니다. 오리우엘라를 넘보는 자기 생각을 재고해 볼 만한 좋은 기회가 될 거고요. 체사레는 누군가가 자신을 넘어 오리우엘라를 욕심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자기는 그녀와가 일곱 살 때부터, 그녀의 모든 가능성을 사랑하며 키워내었고 또한 복종해 왔습니다. 이런 두터운 유대를 감히 누가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뭐해?' 체사레는 흘끗 뒤를 돌아 봅니다. 어디선가 씻고 온 것 같은 오리우엘라가 물을 줄줄 흘리며 나타납니다. '막사는 왼쪽입니다. 헌데, 다리는 괜찮으십니까?' 오늘 오리우엘라가 전투에 불참한 건 왠지 다리를 삔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 때문이었어요. 오리우엘라는 다소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그의 책상에 턱 걸터앉습니다. '기우였다.' 체사레는 몸을 숙입니다. 그녀의 바짓자락을 걷어올려 - 물에 달라붙어 좀 힘들었습니다 - 그녀가 아프다 했던 오른쪽 종아리를 확인합니다. 꾹꾹 누르고, 돌려 보고, 그런 와중에 오리우엘라가 무심히 책상만 둘러 보고 있자, 그는 다시 일어섭니다. '괜찮으신 듯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근시일 내에 적의 총사까지 나오는 대규모 회전은 벌어지지 않을 모양입니다.' '왜?' '제가 도르프슈투벤을 베었습니다.' '.......' '예거. 그 작자와 함부로 말을 섞지 마십시오. 근본이 천한 자입니다. 격이 다릅니다.' '내가 언제 그자를 내 애인으로 삼기라도 한다더냐? 왜 수준 운운인가.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그의 전술뿐이다.' '예거. 제 충고에 귀 기울이시는 편이 좋습니다. 제가 오늘 그에게 미친 듯 칼을 휘두른 것이 괜한 이유가 아닙니다.' '뭔데?' '그자는 당신을 '내 여자'로 삼겠다 했습니다.' '야망 있군.' '예거. 제발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자가 적군에 있는 이상 예거께서는 패하셨을시 명예로운 죽음을 맞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패배를 가정하고 말함이라?' '......만일의......경우를....... 죄송합니다. 제 과오입니다.' '알면 됐다.' 그녀는 영 빈정이 상했다는듯 인상을 찌푸립니다. 

'그건 그렇고, 칼은 왜 책상에 올려 두고 난리야?' '도르프슈투벤의 피입니다.' '기념품 전신가?' '그보다는 의미가 더 큽니다.' 오리우엘라는 팔을 들어 알라이녜를 짚습니다. 피에 손가락이 닿아요. 그녀는 그것을 꾸욱 찍어 보지만, 이미 딱딱히 굳은 피는 묻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굳은 피를 슥슥 문지르며 무심히 말합니다. '괜찮은 사람 같던데.' '예거.'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분노까지 들어 있습니다. '어리잖나.' '.......' '자기도 모르고 한없이 어려. 어쩌면 저토록 껍질 하나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마냥 얕은가.' 체사레는 이전 그의 모습을 잘 모르는 오리우엘라가, 자신과 같은 평가를 내리자 입을 다뭅니다. 그렇죠. 자신의 왕이었죠. '나는 그처럼 천진한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잘 다듬으면 쓸 만할 거야. 적군으로서든 아군으로서든.' '저는 그자를 어찌 다듬을지 도통 감이 서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를 제 칼로 처단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건,' 오리우엘라는 책상에서 뛰어내립니다. 체사레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갑니다. '내 알아서 하마.'

체사레는 오리우엘라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송충이가 뽕잎을 뜯어야지 그가 그녀 아니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그러나 그 뒤 몇 달 간 바라이스는 정말 전장에 나오지 않습니다. 체사레는 망중한이면 항상 그의 생각을(?) 합니다. 자신이 좀 심하게 올려 찌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상처를 핑계로 이토록 오랫동안 전선에 나오지 않을 사람은 또 아니거든요. 대충 아무는 건 사순이면 됩니다. 그런데 두 달이 넘도록 총사령관께선 나서지 않으신다 주제를 알라 같은 소리만 게외보르트 기사에게 듣고 있으니 뭔가 이상한 겁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 사실을 오리우엘라에게 말했다가는 그녀의 엄청난 비웃음을 받을 것이 뻔하므로, 그저 혼자서만 의아히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바라이스가 이 전쟁터에 없는 것은 결코 아니고요. 그가 없으면 전선이 이리 일진일퇴할 리도 없지요. 분명 저 뒤 막사에 있는 것은 분명한데, 절대 나오지를 않는 겁니다.

체사레는 이처럼 사태를 이상히 여기지만, 점차 의외로 상처가 깊었나 보군 생각하게 됩니다. 오리우엘라가 옆에서 너무 자연스레 그리 생각하고 있어서 따라온 감이 있어요. 좌우간 그는 제 칼이 늑골 이상으로 올라갔다면 거의 넉 달 간은 자리에서 앓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약간 마음을 놓습니다. 그래서 사건 칠순 뒤 있던 회전에서는 구태여 오리우엘라 옆에 붙지 않지요. 지휘자를 두 갈래로 둠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자신의 바라이스에 대한 경계 때문에 아예 포기하고 있던 거거든요. 오리우엘라는 그러려니 그의 조심스러운 용납을 듣습니다. 그리고, 나가지요. 그녀 옆에는 물론 체사레 수하의(딤니팔군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기사가 한 스물은 붙어 있고...

전장의 오리우엘라는 정말이지 태양입니다. 딤니팔의 상징처럼요. 황금빛 갑옷에(총사령관은 예나 지금이나 흰 갑옷이고, 지금은 체사레가 그 위치에 올라있지요. 왕족은 기본적으로 금빛 갑옷입니다), 딱 중요한 부위만을 가려주는 투구, 그 사이로 묶여서 슬쩍슬쩍 보이는 금발, 금빛 안장과 고삐. 그리고 일단 여인의 움직임이란 게요.. 남자와는 상당히 다르지 않습니까? 좌우간 그래서 오리우엘라는 전장에만 나가면 아군이고 적군이고 가리지 않고 모든 시선을 받습니다. 아군은 그녀를 사랑하고, 적군은 그녀에게 경도되지요. 시각적 효과라는 건 무시할 수가 없으니... 그날도 오리우엘라는 그처럼 당당하게 한쪽 진영축의 첨단에 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 바라이스와 마주치지요. 이번에는 체사레가 없습니다. 그는 저 멀리 있어서 그녀가 그와 조우한 줄도 몰라요.

'다시 뵙습니다.' '아.' '저는 예거를 지금 모실 생각이 없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나 역시 너를 지금 잡아 족칠 생각이 없다. 안심하거라.' 바라이스는 고삐를 잡아당기며 웃습니다. 오리우엘라는 그에 눈썹을 치켜뜨며, 괜한 일기토를 만들지 않고 돌아 나가려 하지요. 바쁘지만 않았으면 놀아 줬을 텐데, 오늘은 자기도 엄청 바쁜 날이라서요. 그런데 그 순간, 바라이스가 칼로 그녀의 앞길을 막습니다. 오리우엘라는 콧등을 베일 뻔한 것을 직감으로 알아차려 뒤로 피합니다. 바라이스는 말하지요. '다만 오늘은 여기 계십시오.' 

이미 오리우엘라의 반오파린(그녀의 장검 이름입니다)은 시퍼렇게 날이 살아 바깥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녀는 일단 견제 간격을 둔 뒤, 인상을 찌푸리며 묻습니다. '방금 네 말은 이만 헤어지자는 뜻이 아니었나.' 그의 답은 간단합니다. '아니요. 예거 당신을 잡아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지요.' '뻔뻔하기가 황소 궁둥이 같군. 무슨 자신으로 그리 말하나?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내 자식들에게 명을 내린다면 너 역시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건 예거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이마를 긁어요. '그래서 뭐? 지금 그렇게 하자고?' '아니요. 그냥 여기에 계십시오.' '할 일 많다.' '저 역시 할 일이 많습니다. 적군의 총사령관을 한 자리에 묶을 수 있다는 이점으로도 여전히 불만족스러우십니까?' 오리우엘라는 입을 다뭅니다. 계산을 해요. 자신이 오늘 해야 하는 것은 사기 진작이지만, 저 인간이 오늘 해야 하는 것은 전군을 이끄는 총사의 역입니다. 체사레가 지금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그건 저울에 달아 볼 수라도 있지만, 현재 그녀의 무게로는 저울 눈금을 보는 것조차 좀 염치없는 일이 되거든요. 

그녀는 되묻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으면 너 역시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 '예.' '진심을 말하렷다.' '진심입니다.' '왜?' '이유는 저번에 말씀드린 줄로 압니다.' 오리우엘라는 기사 한 명을 보내 체사레에게 알리지요. 물론, 알린다기보다는 통고고요. 그녀는 칼을 넣습니다. 주변에서 웅성웅성거리지만 신경도 안 쓰지요. 바라이스 역시 칼을 넣고, 제 뒤의 기사들을 물립니다. 오리우엘라는 그가 옆으로 비죽 나간 방향으로 말을 몰지요. 언덕 위에요. 기사들은 그녀를 끝까지 따라가겠노라 아주 땅바닥에 누워 뗑깡을 부릴 기세입니다. 그렇지만 끝내 오리우엘라에게 죄다 지고요, 이쪽이나 저쪽이나 닭 쫓던 개 꼴로 언덕 아래를 휘두르고 지킬 뿐입니다. 아.. 그 어색한 침묵.....

오리우엘라는 언덕을 오르며 바라이스에게 묻습니다. '내 남편이 널 반 죽여놨다던데.' '공께선 과장이 심하십니다. 달포만에 완쾌되었습니다.' '그럼 그간은 왜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고?' '공의 오해를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오해를 사서 지금 나와 붙어 있고자 했다 운운은 지껄이지 마라.' '그리 지껄일 예정입니다.' '아내는 왜 죽였어?' 바라이스는 뒤를 돌아봅니다. 오리우엘라는 그를 보고 있지 않습니다. 말 위에서, 약간 아래에서 벌어지는 살인을 보고 있지요. 그녀는 재촉하지 않습니다. 재촉하지 않기는커녕, 자기 질문에 아예 한 치의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여요. 그는 약간의 오기로 답합니다.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저런.' '죽어 마땅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나와는 영 안 맞겠군.' '예?' '나는 남자를 끌어들이는 게 일상이니까.' 물론 거짓말입니다. 체사레가 충분히 노력하는데 그녀가 왜 구태여 귀찮게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겠어요? 그러나 바라이스는 또 금세, '제가 당신을 가진다면 너는 절대로 천박한 웃음을 흘리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음. 재미있군. 오리우엘라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도르프슈투벤. 내가 이리 말한 이상 당신은 영영 나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없을 테지. 바람직한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최선이지.' '자, 봐 봐. 사이페르트 1세는 너와는 두 살 차이다.' 바라이스는 왜 뜬금없이 자기 동생 이야기가 나오는지 몰라 그녀를 노려봅니다. 그녀는 여전히 표범처럼 아름답게 몸을 곧추세우고 있어요. '무슨 소리야?' '그 즉슨, 네가 머리가 굵을 때, 네 동생 역시 거의 시간 차이 없이 따라 컸으리라는 거지. 너보다 그가 똑똑하다면 어쩌면 조금 더 빨리.' '본론만 말해.' '왜 그자는 왕비의 부정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그의 칼이 자제를 못하고 날아옵니다. 오리우엘라는 쩡하고 그것을 막고, 힘을 죽이느라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나지요. 그녀는 펄쩍 뛰려는 아랫 기사들에게 손을 들어 주고는, 빠르게 말합니다. '진정하지. 나 역시 내 어머니의 부정 탓에 이 자리에 선 것이니. 똑같은 이치로 생각해 보자 이거지. 도르프슈투벤. 내가 과연 내 어머니의 침실을 엿보지 못했을까?' 바라이스 역시 딤니팔의 사정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의 기세는 파르르 떨리다, 서서히 서서히 가라앉습니다. 

'그럴 리가. 나뿐만이 아닌 내 오라비 역시 그 장면을 많이 봤지. 그리고 그는 얼어붙고, 자신 속으로 침잠하고, 약간의 열병 같은 혐오에 시달렸다. 반면에 나는? 나는 그날 밤 잠에 들 때 그 장면을 기억조차 못했지. 나중에야 나는 라파가 그에 심한 압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보호했다. 언제고 어머니의 외도에서 한 발자국 물러날 수 있도록. 아무 영향 없는 내가 그 접점에 서 있도록. 이랬더니 나중에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더군.' '납득이 가게 말해.' '너는 납득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뻔히 설명을 하는데 이해를 못하면 천치지. 네 천치가 되어도 끝까지 설명하랴?' '해.' '멍청한 놈. 사이페르트 1세가 나다. 그 역시 너와 별다를 것 없이 왕비의 부정을 목격했을 테지. 그와 내가 다른 점이라면, 나는 라파를 어머니에게서 배제시켰고, 사이페르트 1세는 너를 왕비에게 밀어넣었다는 점이지.' '헛소리군.' '이게 왜 헛소린가? 생각해 봐라. 넌 어렸을 때부터 세상의 불행이란 불행은 다 떠안은 것처럼 온갖 죽상을 하고 다녔을 거다. 고작 두 살 아래의 사이페르트 1세가 그 이유를 몰랐을 리 없어. 그리고 이미 전조를 보이기 시작한 네 여성 발작도 눈치 챘을 것이다. 남자의 의심이란 무섭지.' 오리우엘라는 체사레의 뺨을 다시 한 번 갈기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합니다. 

'네가 여자를 못 믿고 증오하게 된다면 아이는 어떻게 보나? 끝장이지. 그 혐오를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면 금상첨화로 끝장이다. 사이페르트 1세는 조숙하게, 혹은 직감으로 너를 망치는 것이 제 왕도의 지름길이라고 본 것이다.' 바라이스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가 너를 얼마나 많이 왕비의 침실에 밀어 넣었는지 기억해라. 그의 입에서 얼마나 많은 부정에 관한 담론이 나왔는지, 그가 네게 얼마나 많이 왕비를 상기시켰는지를 기억해. 나는 이로써 그가 너를 제 주구로 격하시켰다는 사실을 안다.' 바라이스는 웃습니다. 미소요. 오리우엘라는 처음으로 기대하지 않던 반응이 나오자 의아하게 그를 바라봅니다. '창년이 어디서 날 설득시킬 수 있다는 베갯머리 망상만 품고 왔군.' 그녀는 이마를 긁적입니다. 생각보다 심각하군. 

'이것 봐. 도르프슈투벤. 냉정히 생각해라. 너는 군사적으로 아주 탁월하다. 빈 말이 아니란 사실은 나도 알고 너도 안다. 그럼, 그런 사람을 아무 불안 없이 휘두를 수 있는 사이페르트는?' '입 다물어.' '이봐, 내가 체사레를 안심하고 거둔 건 그를 나와의 결혼으로 내게 묶어둔 뒤다. 이 정도가 아니면 완전한 신뢰는 불가능하다. 현재 사이페르트 1세가 네게 얼마나 큰 구속구를 가지고 있지?' '말도-' '됐으니 내가 말하지. 하나도 없지? 그는 널 자유롭게 내버려 둘 거다. 유년기가 엉망진창인 놈이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야망을 품을 수 있을리 만무하니까. 너는 주구에서 끝이야.' 오리우엘라는 이제야말로 그의 칼에 대비합니다. 그러면서도 입은 조잘조잘 칼처럼 내쏘지요. '여성 혐오? 때깔은 좋지. 그러나 그 단어의 속뜻은 그냥 멍청한 거지. 기본적으로 축소 사고라는 게 안 되는 놈이란 거니까. '인간은' 이렇게 얘기하지만 인간 이거 어디 있나? '왕은' 이러지만 왕은 어디 있어? 구체적인 너, 나, 사이페르트, 이것만 있는 것이지. 추상명사, 무형명사로서의 사람은? 전설이다. 너에겐 이 가장 단순한 사고조차 불가능한 거다. 여자가 싫은가? 혼자 쳐박혀 멸종하던가.' 그녀는 할 말을 가뿐히 끝낸 뒤에 뭔가 기대하는듯 한 눈으로 바라이스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리우엘라는 고개를 젓습니다. '그 황당한 그물에 인생을 저당 잡히지 마라.' 침묵. '넌 이미 갱생불가다. 하지만 망친 놈이라도 자길 망친 사람에게 되갚을 수 없는 건 아니지.' 

'넌,' 오리우엘라는 칼자루를 움켜쥡니다. '버러지 같은 네 어미에게 사팔뜨기 눈을 물려 받았군.' '.......' '게외보르트의 겉껍질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년이 충고를 한답시고 나서는 꼴이 아주 볼 만해. 우리는 그렇게 치졸하게 상대를 짓밟고 올라서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중의 옥석을 가려내고자 하는 것이지. 그뿐이고, 돌이 옥석이 될 수는 없지. 내 아우는 옥석이 맞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한 이상, 내 혐오가 그에게 조장당했든 그가 나를 노예처럼 부려먹든 그건 이제 아무 의미도 없어. 너에겐 이 기본적인 사고조차 없다. 안심해라. 나는 여전히 너를 가질 생각이니. 나한테 짓밟혀 뼛속부터 갈아엎히면 이해하겠지.' 오리우엘라는 팔짱을 낍니다. '다리가 불 탔나?' 앞도 뒤도 없는, 정말 생뚱맞은 질문입니다. 바라이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봐요. 그녀는 고개를 반쯤 숙인 상태입니다. '그놈의 밑빠진 독.......' 그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래에서 소란이 이는 것을 목격하지요. 체사레가 오리우엘라의 통고를 듣자마자 다 집어치우고 온 겁니다.

오리우엘라 역시 그것을 눈치채요. 그녀는 쯧하고 혀를 차며 어떻게 잠시도 못 두고 쨍쨍대나 불평하지요. 오리우엘라는 내려갈 준비를 하며 바라이스를 돌아봐요. 그 역시 이제 더 시간을 지체시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는, 오른손을 들어 보입니다. 오리우엘라는 저것이 게외보르트 특유의 인사인가? 싶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팔을 듭니다. 그리고, 바라이스는 홀로 들려 올라간 그녀의 팔을 감아 당기지요. 오리우엘라는 가까스로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에게 끌려갑니다. 얼마나 대중없이 끌어당겼으면, 순간적으로 그 둘의 투구가 쩡하고 부딪혔을 지경입니다. 오리우엘라는 투구가 맞닿은 그 상태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단단히 고정시켰거든요. 그녀는 두려움은커녕 약간 냉소적으로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남자의 다섯 살 어린 눈을 바라봅니다. 저래서야 완전히 갓 스물 먹은 애송이도 못 되는데. '입 조심해라.' '애송이가- 읍.'

그녀의 감상은 뭐 이렇게 메마른 키스가 다 있나 였습니다. 둘 다 한참 동안 건조한 전장에 서 있어서 입술이 바짝 마른 상태였거든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리우엘라가 전장을 등 지고 있어서, 아래에 선 사람들은 그 둘이 가까이 무슨 얘기를 하나 정도로 생각할 거란 점이에요. 키스는 제법 가볍습니다. 체사레가 항상 저를 잡아먹을듯 하는 것과는 천양지차에요. 도저히 저 말본새와는 걸맞지 않은 조심스러움. 조심스러움! 오리우엘라는 웃음보가 터지려 합니다. 조심스러움! 그녀는 간신히 간신히, 잇몸을 깨물어가며 웃음을 참습니다. 그는 그제야 떨어져 나가지요. 나뭇잎이 비벼지는듯한 키스였어요. 혀는커녕, 별다른 움직임도 없는. 그는 인사도 없이 홱 돌아 내려갑니다. 그녀는 그 뒤에 대고 말하지요. '가지가 잘면 뿌리에서 다 관리하기 힘든 법이지.' 그는 답하지 않습니다. 오리우엘라는 아무튼 대충 과업은 달성했군 생각하고는 말을 돌이킵니다.

그리고, 체사레와 마주치지요. '왜 왔어?' 체사레의 기색은 말 그대로 무시무시합니다. 오리우엘라는 뭘 저리 흥분했나 싶어서 바쁘니까 어서 내려가자는 둥 언덕을 먼저 나섭니다. 그는 그녀를 잡으려다, 가까스로 주먹을 쥐고는 자신을 자제합니다. 따라 내려가지요. 아직까지도 목 안의 불덩이는 사라지지가 않아서 그는 한참 뒤에야, 아래에 있던 기사들과 합류한 뒤에야 오리우엘라에게 말을 걸 수 있었지요. '예거.' '왜? 아, 우칠방 안 나가나?' '오늘은 됐습니다.' '되긴 뭐가 돼. 네가 안 가면 나라도-' 그녀는 팔뚝을 잡힙니다. 오리우엘라는 지체하지 않고 털어냅니다. 그가 자신을 잡는 것에 불쾌함을 느낀 것은 아니지만, 기사들 앞에서 자신에게 손을 대는 것은 다른 문제거든요. 하극상이니까. 체사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아니 애초에 아예 그런 일이 없는 남잔데, 오리우엘라는 순간적으로 당황합니다. 왜? 설마 바라이스 때문에? 하지만 그가 묶여 있어서 당신도 편했잖나? (이 순간 키스는 이미 잊었습니다.) 체사레는 팔을 내리지 않아요. 금세라도 다시 그녀를 잡을 것처럼 반쯤 위로 올라가 있습니다. 오리우엘라는 그의 경직된 몸짓과, 딱딱한 얼굴에 큰일인가 보군 생각합니다. '뒷수습 잘해. 그럼 따라오게 해 주마.' 

체사레는 시퍼렇게 섰다가, 가까스로 옆을 지키는 부사령관에게 일을 인계하지요. 자기는 이만 후방으로 물러난다고요. 오리우엘라는 팔짱을 끼고 그 광경을 보다가 그가 일을 끝내자 먼저 몸을 홱 돌립니다. 그대로 인파(!) 사이를 뚫고 후방으로 말을 몰아요. 그녀의 인도 아래 체사레 역시 그녀를 따라옵니다. 오리우엘라는 텅 빈 사령부에 도착해서, 자,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하라 말합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긴급사태가 벌어졌을 때 불안하니까요. 체사레는 기다렸다는 듯 으르렁댑니다. '저 무뢰한이 예거께 입을 맞췄습니다.' '아, 그렇지.' '예거!' '달려온 당신을 빼면 아무도 본 것 같지 않은데. 신경쓰지 마라. 아무 여파 없을 거다.' '여파를 신경 쓰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예거의 배우자로서 화를 내는 겁니다!' 오리우엘라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생각해 보니 저 가짓수도 있었네요. '저도 그의 위험성을 아니 당하셨을 때 왜 반항하지 않으셨냐 따져 묻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그 작자를 왜 만나러 올라가신- 왜 독대하신 겁니까? 그리고 일이 있은 뒤 왜 배웅까지 하셨습니까? 예거께서는 어쩌면 그리 무던하십니까? 위험합니다!' '내 생각에는 별로 안 위험하다. 내 앞에서 그는 재갈 물린 맹수야.' '상관 없습니다! 제 앞에서는 재갈이 풀린 맹수이고, 저는 그를 경계합니다! 오늘만 해도 예거께- 예거! 왜 노여워 하지 않으십니까! 저자는 예거를 구속했습니다!' 오리우엘라는 웃음을 터뜨립니다. '푸하하! 체사레! 어딜 봐도 구속은 아니다! 자기도 겁나서 벌벌 떨며 키스하는데 나는 내가 댓살 아기라도 되는 줄 알았지 뭔가! 하하하!' 체사레는 폭발합니다. 

'예거.' 그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어요. 너무 낮아서, 너무 급격히 낮아져서, 그의 음성은 이제 거의 쇳소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제가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남편입니다.' '내가 나서서 했나? 당한 건데 왜 성질이야?' '애초에 그와 독대하신 점, 그 일 뒤에도 그를 친절히 배웅하셨다는 점은 도저히, 제 기준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사과하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이따위 사태를 반복하지 않겠다 맹세하십시오.' 오리우엘라는 어안이 벙벙합니다. '당신은 아직도 내가 당신 여자라는 확신이 필요한가? 애 넷을 낳아 줘도 매번 이렇게 접촉마다 들끓려고?' '아마 영영 그럴 겁니다. 사과하십시오. 배우자로서의 예입니다.' '당신이나 도르프슈투벤이나.......' '예거.' 

그녀는 사과할 마음이 없습니다. 대신 체사레의 뺨을 끌어당겨, 부드럽게 키스해 주지요. 그는 거친 숨을 토해냅니다. 그녀는 말그대로 쪽쪽 소리를 내며 키스한 뒤에 냉정 좀 차리라는듯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떨어져 나갑니다. 체사레는 굳은 채 서서는 그녀가 다시 칼자루를 잡는 모양을 바라보고만 있어요. '이게 끝인가? 그럼 이만 산개하지.' 체사레는 자신이 이런 성정에 반했다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무슨 말을 이으려다가, 그녀가 전령을 받으러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따라가지요.

그뒤 오리우엘라는 계속해서 전장에 나가지만, 자기를 무시무시한 기세로 엄호하는 남편 덕에 두 손 두 발을 다 듭니다. 바라이스도 이제 딱히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아요. 오리우엘라는 설마 그가, 자신의 본색을 들켰다는 이유로 자리를 피하는 건가 생각합니다. 그녀는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 있었거든요. 게외보르트가 미동도 없으니, 바라이스가 자신에게 충동질당하지 않았단 점은 아주 확실합니다. 그의 기색을 기억해요. 그는 서른 해를 그같은 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제와 어떻게 바뀌겠어요? 오리우엘라는 다른 방법을 고민합니다만, 어쨌든 바라이스가 눈에 띄지 않으니 백 번 무용한 시간낭비지요. 바라이스는 딤니팔로서는 아쉽게도, 결코 찍혀 넘어지지 않는 아집덩어리이자, 동시에 전장의 기둥이었습니다. 그녀는 약간 성이 나지만, 국경이 지지부진한 이유가 바라이스라는 점은 확실히 인정합니다. 골치 아픈 적이에요. 

한편, 바라이스는 그녀에게 강제로 입맞춘 뒤에도 아무 변화가 없는 자신에게 약간 당황한 상태입니다. 분명 그녀를 '꺾고' '정복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일단은 강제로 무슨 짓을 했는데 영 성에 차지도 않고, 그렇다고 키스가 아쉬워 더 무언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고, 아니, 애초에 키스 전후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그는 스스로 제 감정을 오해했나 싶었지만, 감정의 무게를 잴 수 있을 만한 저울이 없어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그가 해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전쟁뿐이었지요. 그래서 그리했습니다. 얼마 동안은 착실히 전략에 몰두했어요. 딤니팔을 밀어내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 와중, 해가 바뀝니다. 225년으로요. 이제 예거는 스물여섯, 체사레는 서른여섯, 바라이스는 스물하나가 되는 시점이지요. 오리우엘라가 체사레와 합류한 지도 이제 여섯 해가 가까워져 옵니다. 그들의 첫 아이는 꽉 찬 네 살, 쌍둥이는 세 살, 딸(아레아)는 두 살이고요. 국경은 거진 바뀌지를 않습니다. 두쪽 다 악착같이 전선을 쥐고 있으니까요. 바라이스는 아직까지도 제 감정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분명 욕망과 집착이기는 한데, 그럼 자신이 전장 속을 가르는 금빛 맹수를 보면서 짜릿한 황홀감을 느끼는 이유는 설명이 되지 않아요. 마치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유리벽이 단단히 막아서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는 키스 이후로도 오리우엘라를 많이 봤지만, 애초에 그녀의 모든 말을 차단시켜버립니다. 그외에는 딱히 달라진 지점도 없어요.

오리우엘라의 추측은 사실 바라이스가 수 번이고 검토해 본 사안입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자기가 오리우엘라에게 말했던 이유도 있고, 둘째,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아우가 자신을 망쳐놨다기보다는 세상의 진실을 보여준 것 같은 거에요.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바라이스에게 저건 이미 어떻게 함락될 수 없는 철옹성으로 남은 생각입니다. 아우가 그짓을 했든 하지 않았든 자기는 어느 순간에든 진실을 알아 여자를 적대하게 되었으리라 생각하는 거죠. 

그는 딱 거기까지 생각한 뒤 아예 접어버리려 합니다만,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는 다시 오리우엘라가 끼어듭니다. 그녀는 어떻게 부정할 수 없을 만큼의 여성이거든요. 처음에 자기는 내가 그녀를 함락시키고 싶어 한다는 말로 마음을 정당화했지만, 키스 이후에도 꺼림칙하게 무던한 스스로를 보면 이미 그마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바라이스는 자신이 그녀를 좋아? 사랑?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않습니다. 아예 사고회로에 없는 거에요. 그래서 항상 거대한 물음표만 하나 떠 있지요. 오리우엘라와 몇 달에 한 번 전장에서 마주쳐도 의례히 하는 조롱을 제외하고는 아무 사적 대화가 오가지 않고요. 바라이스는 감정적인 의문을 이겨내기 위해 전투에만 매진합니다.

해가 지나고, 226년, 그리고 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 227년. 바라이스는 이제 슬슬 그 당시 자기의 감정이 환상은 아니었나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전장의 오리우엘라는 살아 있고, 전투에 나오면 항상 그 시건방진 금빛 태양을 찾고, 찾아가지는 않지만, 항상 눈으로 그녀를 좇고 있는. 그녀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람을 죽일 때와 같은 흥분은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바라이스는 결국 몇 주 간 이런 자신의 기묘한 감정을 검토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와중 무니시팔의 열다섯짜리 딸과 결혼하는 건 어떻냐는 아우의 제안이 들어오지요. 나쁠 것 없습니다. 아우의 제안은 물론, 이미 절반 이상 게외보르트의 부속 국가가 된 서 딤니팔에, 그 후계자마저 자신과 그 딸의 자식으로 놓으려는 속셈이지요. 그러면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융합될 테고요. 그리고 사이페르트 1세는 서간에다 대고, 자식이 네 핏줄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고, 네가 확인해야 하는 건 정치적 주구의 탄생이라고, 그러니 개인적으로 배를 붙인다 생각지 말라 합니다. 보통 관계였다면 기함을 하고도 남을 무례한 언사지만 바라이스는 외려 만족합니다. 결혼을 자신의 영역이 아닌, 공적인 영역에 두는 동생의 태도 덕분이지요. 그는 구태여 - 당연히 - 여자를 의심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망치로 못을 박는 정도의 무감동한 일이니까요. 

게다가 그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는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딤니팔의 핏줄이 눌라레를 이어 마가 끼었(이건 물론 게외보르트의 입장이고 보통은 엄청난 유혹이라고들 표현하지요)다면 내가 오리우엘라에게 기묘한 생각을 가진 건 그녀가 딤니팔의 손이라서가 아닐까? 서서히 서른으로 접어들고 있는 여인이(28) 이전보다 더욱 빛이 나는 것은 그의 상식으로 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녀 같아요. 그래서 그는 그 위명 자자하다는 딤니팔의 손을 잡아 보자는 생각 역시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다섯이면 스물여덟보다는 확실히 배는 아름다울 테니까요. 그래서 동의합니다. 솔직히 무니시팔도 사이페르트의 속셈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아우가 얼마나 큰 협박과 공작을 했는지 그의 딸은 자신이 제안을 수락한 것과 거의 동시에 전장 근처의 성에 도착합니다. 그는 그녀를 보러 갑니다.(정확히는 결혼하러 가는 거지요.) 그리고, 바라이스는 진짜 맥이 탁 풀릴 정도로 실망을 합니다. 안 예쁘냐고요? 아 물론 절세가인은 아닙니다만, 그냥 평범하거나, 꾸미면 나이에 힘입어 아름다울 소녀였지요. 

그러나 오리우엘라가 아닙니다. 도저히, 어떻게 가늠할 수도 없이 그들 간의 간격은 까마득한 데가 있어요. 핏줄이 그리 멀지 않은데도 소녀는 오리우엘라가 가진 '힘'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삼 년 전 자신의 머리를 후려쳤던 그 태양의 힘이요. 아직까지도 그것은 그물처럼 자신을 옭아매는데, 그에 몸이 결리다 못해 이곳까지 도피해 온 자기에 대한 위안이라고는 정말 개코도 없는 겁니다. 그는 엄청나게 실망했지만, 애초에 그게 자신의 제1이유가 아니었으므로 결혼은 합니다. 열다섯과 서른셋이죠... 

그들의 결혼 사실은 거진 일주일 뒤에야 세간에 공개됩니다. 오리우엘라는 사실 이전에도 어쩌면.. 수준으로 알음알음 이걸 알고 있었지만, 설마 무니시팔이 그 정도로 멍청할까 싶어서 끝까지 참았던 거거든요. 그런데 정말 결혼을 시켰답니다. 자기 딸과, 현 게외보르트 왕의 형제를요! 그녀는 드디어 노발대발합니다. 무니시팔이 게외보르트를 끌어들였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예 선을 잃어버린 느낌입니다. 저 미친놈이 그렇게까지 배알이 없을 줄은 몰랐거든요. 라파가 그렇게나 아꼈는데! 그와 그리도 절친한 지기였으면서, 그리고 딤니팔의 충실한 신민으로서 어떻게 저따위 짓을 한답니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노여움을 터뜨리다, 드디어 깨닫지요. 무니시팔도 기어이 '목숨 보전'의 단계로 들어섰구나. 머릿속에서 자신이 죽인 라파가 드글드글 끓습니다. 그의 마지막 추태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다가오죠. 동시에 그런 그를 제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마저 재차 자각하게 되어서, 그녀는 이성을 잃습니다. 라파는 언제고 오리우엘라의 마지막 선이었어요.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무니시팔에게 친서를 보냅니다. 네놈이 비열한 것은 하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 비열함이 딤니팔의 왕위를 차지하기 의한 수단으로써의 비열함인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아니더냐? 너는 이제 그런 욕망이 없느냐? 죽음이 그리 두려운가? 도대체 삶과 죽음이 그래 몇 치 차이라고 다들 그렇게 지랄같이 버둥버둥 매달리나? 이런 식이죠. 그녀의 편지는 도무지 성을 자제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체사레가 그것을 제지하려 가까이 왔다가 진짜로 뺨을 얻어맞았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그 욕설투성이인 서한은 정말 조금의 검열도 없이 무니시팔에게 가게 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리우엘라는 그렇게 믿고 있었지요. 그 서간은 바라이스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어린 아내를 곁에 둔 채로 그것을 읽고, 다시 읽고, 마치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묻습니다. '네 아비가 내게 생을 구걸하던가?' 사실 소녀는 이 사람을 무서워합니다. 딱히 그간 그가 그녀에게 잔인하게 굴었기 때문은 아니고요, 거진 아무 정보도 없었던 잠자리에 덜덜 떠는 것이지요. 소녀는 약간 움찔했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버님은 그러지 않으신다 말해요. 왜 한 나라의 왕을 '네 아비'라 부르냐 라는 지적은 감히 하지도 못하고요.. 

'똑바로 말해.' '그런 말씀은 안 하셨어요....... 하실 분이 아니세요.......' 그는 다시 서간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이 여자가 이렇게 말하는데.' '.......' '네 아비가 목숨이 아까워 딤니팔의 자존심마저 버리고 내게 너를 바쳤다는군.' 이야.. 진짜 애를 상대로 말조심이라고는 엿 바꿔 먹은 놈입니다. 소녀는 그 치욕스러운 말에 울컥하지만, 어떻게 반박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자신이 침묵하는 것조차 제 목숨이 아까워서인데, 이런 자신이 어떻게 감히 아버지를 판단하겠어요. 바라이스는 서간을 뚫어져라 보다가, 품에 넣습니다. 그리고 종이와 깃펜을 들고 오라 시켜요. 그리고 소녀가 그에게 그것을 가져다 주자마자 번개와 같은 속도로 씁니다. '신경 쓰지 말 것. 당신 일이 아님.' 딱 두 문장(문장도 아니지만)을 씁니다. 여기에는 좀 유치한 심리도 없잖아 있습니다. 나는 당신 때문에 이토록 휘둘리는데 당신은 나에 대해선 전혀 생각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 노여움으로라도 그녀의 감정을 북돋우려는 겁니다. 그는 뻔뻔하게, 무니시팔에게 그녀의 글자 하나도 보여주지 않고 자기가 나서 답장을 보냅니다. 

오리우엘라는 고개를 빼고 무니시팔의 답변을 기다리다, 전령이 오자 그 자리에서 그 편지를 빼앗습니다. 읽습니다. 체사레는 뒤늦게야 그녀를 따라왔다가, 그녀가 조용히 편지를 접는 모습만 보지요. 그는 묻습니다. '예거. 뭐라 합니까?' '입 닥치라는군.' 체사레는 전에 그토록 펄펄 뛰던 오리우엘라가 저따위 답변을 받고 어떻게 이렇게 잠잠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왜 화를 안 내시냐 말했다가는 더 큰 불똥이 튈 수 있으므로, 그리고 어차피 무니시팔의 답장은 예상 가능한 것이었으므로 그저 침묵합니다. 오리우엘라는 기묘할 정도로 조용합니다. 그녀는 이제 노여움을 넘어 약간의 비애감까지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니시팔은 이제 어떤 것도 아닙니다. 아무런 권한이 없어요. 중간에 암살당하든 양위를 하든 서 딤니팔의 2대 왕은 바라이스가 물려 받겠지요. 그것이 그와 딤니팔의 자식에게로 내려갈지, 아니면 그 이전에 이미 흡수통합되어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습니다. 네가 꿈꾸던 왕위라는 것이 그 모양인가. 오리우엘라는 눈을 꽉 감습니다.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체사레를 부르지요. 그는 고분고분 답합니다. 그녀는 지금 수중에 있는 게외보르트 포로를 전부 처형하라 합니다. 체사레는 그녀의 비이성적인 요구에 놀라지만, 이것이 단순히 감정의 발로인 것이 아니라 결혼에 대한 항의의 의미가 될 수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어떻게 설득을 해 보려다, 일전에 뺨을 맞은 것과 같은 결과가 날까 싶어 무용한 노력을 접습니다. 체사레는 그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합니다. 긴 장대를 박고 그 위에 엄청난 수의 머리를 효시해 두지요. 바라이스는 그것을 보고는 여러 의미를 내포한 웃음을 터뜨립니다. 까마귀만 북적이는 신혼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