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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서평 2


뤼시 님 투고



  나무를 담벼락에 끌고 들어가지 말라. 제목부터 무척 특이한 소설이다. 조아라에 연재되고 있는 소설들을 봐 왔지만 나담은 그 시작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무'를 실제로 담벼락에 끌어다 넣을 수는 없다. 그러면 나무와 담벼락이라는 대조되는 단어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의문을 품은 채 읽기 시작했는데 이미 그런 것은 잊어버렸다. 1화의 스크롤을 내리면서 빠져들고, 밤을 새워 읽고, 엄청난 연재분을 순식간에 따라잡아 다음 편에 목을 매는 것이 많은 독자들의 모습일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코멘트란에는 종종 나담을 읽다 멈출 수가 없어 시험을 망쳤다는 등의 원성어린 리플도 올라오는데, 이런 중독성이야말로 이 소설의 흡인력과 내공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많은 독자들이 나담의 가장 큰 장점이라 말하는 것은 바로 탄탄한 세계관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소설은 세계를 설명하는데 그리 친절하지 않다. 배경이 되는 곳은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유럽, 혹은 어딘가, 비슷한 양식을 가진 인간의 문화와는 동떨어져 있다. 판타지 세계라는 배경은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정당화할 수 있지만, 그만큼 어려움도 따르기 마련이다. 다른 세계, 다른 사람들, 다른 사고방식을 독자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는가? 십이국기의 작가 오노 후유미는 작품 후기에서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이세계에서는 분명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텐데, 어떤 방식으로 이것을 쓸 수 있을까. 테이블을 테이블이라고 써도 될지, 혹은 속담마저도 가상의 언어를 상정하여 바꿔야 하나? 나담에서는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이 모두 이 '세계'의 사람이지만, 비슷한 질문이 수없이 튀어나올 것은 분명하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어떤 시점을 파고들든지 생활상과 배경에서 그 인물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품설정, 혹은 본편 내에서 작가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풀어놓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또 다른 방식은 기존의 세계관을 따오는 것이다. 많은 판타지소설에서 톨킨의 설정을 답습하고 있으며 이는 작가 입장에서도 굉장히 편리한 길이다. 
  그러나 나담은 이제껏 알려진 적 없는 세계를 창조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말 그대로 보여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반비님이 그리는 나담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들이대기 때문이다. 가끔 거슬릴 정도로 설정을 투입하는 여타 소설과는 다르게 그저 담담한 모습이 신선하고 좋았다. 2부 시작 후에는 블로그와 트위터를 통해 뒷설정이 풀리고 있지만 말 그대로 뱀발일 뿐, 본편의 흐름과는 무관하다고 해도 좋을 수준이다. 물론 첫 연재인 만큼 그런 구분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외전이 연재되면 잡음이 일었고 2부 진행에서도 지적된 부분이 있는데 이는 연재 중의 1부 리메이크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많은 이들이 매력으로 꼽고 있는, 사실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지만, '작명' 또한 타당성을 부여하는 수단이다. 사실 독자가 등장인물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은 한정되어 있다. 생에서 소설 안의 짧은 순간, 그마저도 작가가 스포트라이트를 비출 때만 생각과 행동이 뚜렷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물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에게 어떤 방식으로 행동양식과 개연성이 부여되어야 하는데, 이름이 그에 보탬을 준다. 발렌시아 마조레 기지 얀 미라이예, 미라이예는 가문명이고 기지는 외가의 성이다. 솔 미라이예 저택과 또 다른 미라이예 앙히에는 본편에 등장하지만 기지 가는 그렇지 않다. 사촌형제는 없나? 부모님의 이름은? 어떻게 만났을까? 얀 미라이예는 딤니팔 귀족의 성이고, 올 발루아는 라르디슈 왕족에게 붙는다. 인물을 상징하는 이름을 통해 파생되는 '썰'과 2차 창작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비단 사람만이 아니라 지명과 사물에서도 그렇다. 외전 중 하나에서는 주인공인 레아를 통해 톨레도와 알로지아드 가도, 알론조 캄비가 나왔다. 그야말로 소설 한 편이 나올 정도로 자세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외르타의 이야기에 집중하자면 곁가지에 불과한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이름은 비사 오필라, 게외보르트의 왕궁이다. 관심 가는 설정은 이밖에도 넘친다. 비사의 연회, '영광된 짐승' 어수대/무명과 이들 조직의 암호체계, 알로지아드 가도와 알로지아드 기사단, 귀족원과 왕의 전통적인 대립까지.
  그런데 이처럼 방대한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 십이공회는 작중에서 여러 차례 소집되었지만 첫 등장에서도 유래와 구성원의 내력 따위가 구구절절이 묘사된 적은 없다. (원탁의 역사를 빼면) 그저 회의가 진행되고, 대화를 나누고, 앞으로의 전개를 짐작하게 해준다. 작가에게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는 사랑스럽고 당연한 것이지만 소설이 연대기 식으로 일어난 일과 일어날 일들을 설명한다면 매력이 반감될 수도 있다. 나담은 이런 길을 성공적으로 피해갔으며, 독자는 불친절한 진행을 통해 오히려 실제 존재할지도 모르는 평행세계를 엿본다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이렇듯 나담의 중앙삼국은 세세한 설정과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녹아드는 묘사를 통해 스스로 생명력을 갖춘 굳건한 세계가 되었다. 나담 1부의 배경은 두 나라의 접경지대인 포티미외 평원이다. 승리한 딤니팔로 돌아간 발렌시아와, 미라이예의 객이 된 외르타가 왕도 오스페다에서 2부를 겪고 있다. 실질적으로 '배경'이 되는 곳은 딤니팔 한 나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라르디슈와 게외보르트, 식민령들, 사막지대, 남부와 동부까지 대륙의 곳곳은 넓다. 이들은 1.5부 안에서만 묘사되었음에도 이미 독자에게 친숙한 땅이 되었다. 이에 더하여 나담이라는 소설에 또 다른 매력을 더해주는 것은 살아 숨 쉬는 듯 생생한 인물들이다.

  나담을 이끌어가는 것은 외르타다. 전쟁터에서 긴박하게 돌아가던 1부와 달리 비교적 평온한 2부로 넘어오면서 한 점에 집중되었던 시선이 여러 곳으로 돌려졌지만 역시 초점은 외르타에게 맞춰져 있다. 나담은 진입장벽이 높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데, 외르타의 과거 탓이 클 것이다. 사실 외르타만큼 처절한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을 찾기도 힘들다. 강간, 폭행, 죽음의 위협과 딸의 죽음을 겪고 복수를 다짐하는 여주인공이라니, 연대기를 빙자한 로맨스라 해도 쉽사리 손을 대기 어려운 설정이다. 이런 질척한 배경에서 외르타의 감정선은 따라가기 힘들 때도 있었고, 포기하는 독자들도 나왔다. 반비님이 2부를 일시 중단하고 1부 리메이크에 들어가신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모성애;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애정이라 해도 아델에 대한 외르타의 그것은 상당히 부자연스럽다. 강간 피해자가 임신했을 때 거부감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심지어 가해자에 대한 증오를 아이에게 투사하거나 자신의 인생을 괴롭히는 또 다른 가해자로 여길 수도 있다. 소설 속 외르타는 현대의 인물이 아니며 아이를 낳아서 길렀다 해도, 이런 반응에서 완벽히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일부의 경우이고 또 다른 일부는 아이를 범죄의 증거로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아이로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외르타가 아델과 함께한 동안 보였던 회피와 집착은 정상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난해한 깊이를 보여 준다. 2부에서 연회장에서 만난 뤼페닝이 도발했을 때 그녀는 스스로를 간교한 년이라 부른다. 죽은 딸에게 기대 살아남으려는 욕심을 정당화한 네가 어미의 자격이 있는지, 레아의 연극으로 자신과 화해한다 해도 어느 밤엔가 아델의 비난을 듣고 소스라치며 깨어난 적은 없을까. 그러나 살고 싶은, 살아가려는 욕망은 욕망이라고도 할 수 없이 당연한 본능이다. 나는 이 부분을 외르타를 이해하는 실마리로 삼았다. 정말이지 처절한 생을 겪은 외르타는 발렌시아와 첫 대면에서 내 겉이 젊다고 속까지 젊겠느냐 소리쳤다. 노인의 마음이 될 만큼 로크뢰를 겪은 외르타가 살기 위한 마지막 끈이 아델이었다고. 죽고 싶도록 괴롭다, 살고 싶다, 복수하고 싶다. 지옥 같은 생을 견디면서도 그토록 살고 싶었기에. 사실 일개 독자에 불과한 나로선 반비님의 집필 의도를 다 짐작할 수 없다. 독자의 한계라는 변명이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어떤 감상이라 해도 내 사견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앞서도 말했듯 다양한 감상과 2차 창작의 여지가 가득한 것이야말로 나담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1부가 완결된 후 시작된 외전의 주 배경은 외르타가 나고 자란 게외보르트였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며 선왕의 다른 자식들을 모두 살해하는 것은 역사에 비추어보아도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하지 않은 설정이었던 연재 초기와는 달리, 주 배경이 게외보르트가 되자 상당수 독자들은 평범한 사고와 거리가 있는 게외보르트의 '팔메'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특히 주인공 외르타가 이러한 동기 살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게외보르트 외부 인물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부분에 이르자 독자에게 수용을 강요한다는 악평도 나왔다. 1.5부에서 리볼텔라와 발터는 무척 매력적이었지만 게외보르트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외르타는 본편과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또한 딤니팔 왕비 레아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도 있었다. 동병상련을 느끼고, 딤니팔의 정의를 표방한다 해도 엄연히 외국인이며 관계도 없는 외르타에 대한 태도가 왕비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는 레아라는 인물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외전에 레아의 이야기가 추가되었고, 본편에서는 레아가 앙히에와 작당하고 연기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조아라에는 작품성 있는 소설들이 많다. 그리고 연재가 중단된 소설도 많다. 지쳐서 혹은 다른 사정으로 많은 소설이 중단되지만 돌아오겠다는 말이 지켜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기다리는 독자들은 애가 타고, 그렇지만 대가를 지불한 것도 아닌데 강요할 수도 없다. 그래서 독자들이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연중이다. 나담은 연재 시작부터 정말 폭풍 같은 속도로 올라왔고 연참과 연참 그리고 연참으로 독자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비정상적인 속도에 익숙해져 다른 소설을 볼 때 고통스럽다는 농담 같은 말도 있었다. 이런 속도가 독자에게는 좋지만 작가에게는 분명 힘든 여정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잠시 연재가 중단되었을 때도 걱정스러웠다. 그럼에도 약속대로 돌아오신, 그것도 상상 이상으로 멋진 2부를 다시 풀어주시는 반비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지금 외르타는 아델과의 약속대로 살아있고자 하지만 그것은 아델이 준 말에 얽매인 삶이다. 그렇다면 아델이 사라졌을 때 외르타는 다시 살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뤼페닝의 가벼운 말에도 극심히 흔들렸기에 항상 이 부분이 불안했다. 한편으로 아델이 삶의 이유라면 다른 사람은 될 수 없을까 궁금하다. 1부와 2부가 꾸준히 나아가는 동안 외르타와 발렌시아 또한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갔다. 두 사람 사이가 변한 것이 없어 보일 때도 있었지만 1부를 정주행하면서 그게 아닌 것을 알았다. 더구나 최근 연재분에서는 어찌나 달달한지 내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 발렌시아는 수십 년에 걸쳐 변화해왔지만 지금도 완성된 인간이 아니고, 외르타도 마찬가지다. 나담에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지만 꼭 같은 생각을 가져야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자신을 강요한 로크뢰가 아니라 외르타를 존중하는 발렌시아에게 호감이 가는 것도 그래서다. 그리고 외르타가 언젠가는 아델이 준 생이 아니라 자신의 생을 살아나가는 것을 보고 싶다. 발렌시아라면 나무를 담벼락에 끌고 가는 대신 햇볕과 물을 듬뿍 줄 수 있을 것 같다.

반비님과 나담을 사랑하는 뤼시lussie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