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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okysy 님 작품




  마차에 내려 발이 땅에 닿았을 때 자연스럽게 올려다 본 시야에 거대한 왕궁이 나타났다. 젊을 적에 보고 20여 년 만에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장엄하게 사람을 짓누르는 궁의 화려함에 낯설다 못해 약간의 두려움마저 느낀 채로 잠시 서있었다.

  “무언가 볼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닐세, 가지.”

  오다가 모래라도 들어간 것인지 구두 안쪽이 까끌거렸다. 새로 산 기억이 아득해서인가 조금이라도 먼 거리를 갈라치면 반드시 라고 해도 좋다. 모래들이 여기저기서 들어와 발 안쪽을 괴롭혔다. 애써 무시한 채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느릿하나 여유와는 거리가 먼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품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다면 굳이 이곳까지 찾아와 일을 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개 숙인 시야에 단순하게 만들어진 진녹색 치마와 흰 셔츠가 들어왔다. 그나마 있는 장식을 찾아 오래된 호박이라도 하나 달았지만 주변의 화려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돈이 모여도 내 차림은 여기서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너는 참으로 재미없는 여자다-떠오르는 목소리에 입 안의 침이 쓰게 느껴졌다.

  “과연 추천할만한 사람이군요.”

  소개서를 궁 앞의 경비에게 내밀자마자 길고 긴 거미줄처럼 엉킨 복도를 지나 엄격한 인상에 매우 키가 큰 여성이 있는 방으로 안내 받았다. 며칠은 걸리리라 생각했는데 30분도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궁 깊은 곳으로 들어간 현실이 당황스러웠다. 그리 급한 것일까. 무엇이 있기에.

  “이야기는 들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질문이 따로 있나요?”
  “......숙부님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하고 제가 모셔야 할 분이 계시다는 것만 압니다.”
  “그래요, 그 정도로만 아는 게 좋아요. 그 이상은 알려고도 하지 마시고 당신은 당신의 본분만 제대로 하면 됩니다. 모실 분을 모시세요, 그러나 그분에 대해 알려 하지 말고 하실 일만 하세요. 무엇보다 당신이 그 분을 뫼시더라도 당신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전하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보통 주인을 모시고 주인을 보필하라는 당부치고는 독특한 이야기였다. 이것은 당부라기보다는 경고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표정을 숨기는 것은 잘하는 편이지만 나타났던 것일까. 천장에 닿을 듯이 높은 시선으로 이쪽을 내려 보던 그녀가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할 일만 하세요. 담당하는 자가 계속 바뀌는데 그렇다고 의술을 할 줄 아는 여인은 드물고 남자 의원은 곤란하고, 덕분에 북쪽에서까지 사람을 구해야 하는 형편이에요. 부탁이니 내 말을 새겨들으세요. 또 사람을 구하는 건 힘든 일이니까.”
  “......전임자들은 모두 일을 그만두었습니까?”

  대답을 짐작하면서도 굳이 물어본 것은 이쪽도 나름의 각오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생 로욜의 시녀장은 망설이기보다는 알맞은 대답을 고르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해서 나온 말의 무게가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요, 모두 죽었지요. -였다 와 -었다 중 무엇이 더 끔찍했을까.


  -의원님, 일어나세요. 빨리요.

  내가 가장 익숙해진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새벽에 방문을 울리는 소리일 것이다. 처음엔 지긋지긋함이 나중에는 아연함이 밀려오는 소리에 익숙하게 경장을 차려 입고 도구가 담긴 가방을 들었다. 마중 온 등불을 든 시녀의 안색이 짜증보다는 파랗게 질려있는 것 또한 점점 익숙해졌다. 전임자들이 가장 속을 썩인 것이 자해 문제라면 다행인지 나는 경우가 좀 달랐다. 아니 차라리 그 편이 나았을는지도 모른다. 방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 방의 주인은 나간 것인지 침상에 널려있는 한 여인과 주위의 시녀들만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은은히 나는 피 냄새, 거기에 뒤섞인 한 사내의 흔적. 간신히 누군가 옷을 덮었는지 가까이 갔을 때는 침대에 퍼진 머리카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늘게 뜬 눈이 그녀가 의식을 붙잡고 있음을 알렸다.

  “기절을 하시는 게 더 편합니다, 왕녀님.” 

  아델은.

  “......옆방에 계시겠지요. 미처 보고오지 못했습니다.”

  깼을까.

  “아가들은 한번 잠들면 깊이 잠듭니다. 곤히 자고 계실 거예요.”

  나 소리 질렀는데.

  “방이 얼마나 큰데 벽이 그리 두꺼운데 들리겠어요? 일단 치료하고 몸 닦고서 따님을 뵈러 가요.”

  개자식.

  “......아래부터 하죠.”

  들은 바에 의하면 이전에는 웃음과 울음, 그리고 비명이 뒤섞여 의사조차 제대로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괴기 어린 모습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옷자락을 걷고 다리 사이를 조심스럽게 수건으로 닦아내는 내 손길을 외면한 채로 침상의 비단을 세게 쥐는 모습에 그런 모습은 찾기 힘들다. 이유가 그녀 자신이나 아님 방금 이 방을 나간 남자가 아니라 옆방에 자고 있을 아이 때문이라면 오직 그뿐이라면 내가 보기에 상황은 나아지기보다는 악화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자인 나조차도 가볍게 꺾어버릴 정도로 가는 팔이 조금씩 떨려왔다. 다리 사이의 상처가 생채기가 무수히 나는 것이라면 상체 쪽은 반복적인 억압과 폭력이 동시에 행사되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처음 그 흉터들과 흔적들을 보았을 때는 혐오마저 느낄 정도로 참혹한 과거가 새겨져 있었다. 멍이 들어 벌겋게 변해버린 팔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다. 금이 가지는 않았어도 이렇게 보호를 해두어야 적어도 일주일은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철없던 어린 시녀들이 그녀를 부럽다 속삭이다가 그 말이 사라지고 침묵만이 자리 잡다가 어둠 속에서 속삭이게 되는 시간만큼 이곳에 있었다. 자신이 온 뒤로 반 년, 이 전에는 5년 남짓, 이것이 그녀에게 시작이 아니라는 게 때때로 견디기가 어렵다. 마무리를 끝내고 새 옷을 가져다 그녀의 몸에 두르자 버틸 수 없던 것처럼 왕녀는 기절이나 다름없이 잠들어 있었다. 승은이라 여긴 적도 있다. 총애라 부르는 것을 안다. 축복이라 억지로 생각하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강간이다.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아니, 아델님 방에 침상이 있겠지요? 그곳에 뫼시지요. 여기는 아무래도 다 새로 정리해야 할 테니까."

  잠자다 눈을 뜬 곳이 어제 강간당한 곳이라면 그 끔찍함을 어찌할까.

  "제가 안을까요?"
  "부탁해요, 블랑쉬."

  아무리 말랐어도 나와 키가 별다르지 않은 왕녀를 들기는 무리다. 다행히 이 하녀는 여자치고는 제법 힘이 좋아 이 일을 부탁하는데 항상 적격이었다. 자신만큼 표정의 변화가 없는 담담한 얼굴로 능숙하게 해내는 것에 고마움마저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동정을 가진다고 해도 출구가 없는 것이다. 제 전임자들이 모두 그 출구를 찾다 사라진 것에 이제는 확신마저 가졌다.

  시녀장이 말한 추천이란 입이 무겁고 주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간단히 평하자면 철저하게 고독한 여인을 의미한 것이란 걸 궁에 오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고서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정식 명칭이나 지위 없이 그저 이름 뒤에 님을 붙이거나 왕녀라고만 불리던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이 우리의 왕에게 오랜 시간 그래온 것처럼 저항을 하다 부러진 팔을 맞추기 위함이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자기소개도 뒤로 미루고 비명과 욕설을 퍼붓는 왕녀의 뼈를 맞추는 일은 의외로 편했다. 어깨를 잡고 바닥에 누른 순간 새된 비명과 함께 기절을 하여 귀가 먹먹했던 것만을 제외하면 말이다. 신경질적인 여인이다. 정신에 문제가 있는 왕실의 방계 혈족인가. 가벼이 추측을 하던 나는 이제 그녀가 왜 그랬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전하와 그녀가 마주치는 그 날마다 불려가 참상을 처리하는 일을 맡았으니 말이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아이도 없이 홀로 오랫동안 살아온 차가운 여인에게 실로 적격이리라 손뼉을 쳤겠지. 그 광경이 눈에 선했다.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피비린내가 나는 침상에서 눈을 돌리고 주변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오로지 한 사람의 생존을 유지시켜 놓을 것, 이것이 내가 맡은 임무이자 일이었다. 전하의 저런 집착을 인정하지 않는 왕녀에게 의문을 가진 적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다. 좀 더 편히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무모한 저항을 반복하는 자에게 분노와 동정을 느끼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내가 느낀 것은 동정보다는 다른, 감탄에 가까운 동경 섞인 감정이었다. 그녀는, 게외보르트의 왕녀는, 외르타는 강한 사람이었다.

  왕은 바쁜 사람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와 군사, 경제 세 가지에서 터지는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사적인 시간이 그만큼 적다는 의미도 된다. 과장되게 감은 붕대가 이번에도 통했는지 아니면 바쁜 탓인지 보름 이상 오지 않는 왕녀의 별궁은 드물게도 평화로운 시간이 계속되고 있었다. 붉은색의 비단에 금으로 수놓아진 거대한 방석들을 놓아두고 정원의 풍경을 만끽하는 모녀는 그만큼 평온했다. 반년, 시체 같은 상태의 그녀를 새벽마다 보면서도 태양 아래에서는 언제나 딸을 둔 어미로, 기품 있는 여인으로, 자존심이 강한 소녀로 버티는 외르타를 볼 때마다 나는 그녀의 강함이 태생적인 것인지 아니면 게외보르트 왕실에서 담금질이 된 것이 궁금해지고는 했었다.

  "왜 또 왔니?"
  "약을 가져다 드리러 왔습니다."
  "아델 깨니 조심이 놓으렴. 모처럼의 오수인데 그거 하나 둘이서 있게 해주지 않는구나."
  "죄송합니다. 약이 쓰니 과자를 가져오게 할까요?"
  "여기 다 있다. 무슨 약인데?"
  "영양제입니다. 체중이 떨어지셔서 식사로는 감당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거 먹고 힘내봤자 개처럼 덤벼드는 꼴 받아주는 거 밖에 더 있겠니."
  "왕녀님."
  "왜."
  "따님을 좀 더 오래 안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 상태론 받아서 안아주시는 것도 곧 버거워지실 겁니다."

  아마 그때였을까. 내내 그릇에 남은 소스 보듯 하던 그녀의 눈 안에서 내가 인간이 된 것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녹 빛과 갈색 빛이 섞인 눈동자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 점점 선명해지는 것은. 무릎 위에 올려두던 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지나가는 것처럼 왕녀는 나에게 물었다. 자식이 있니. 있었습니다. 아이의 뺨에 닿은 가늘고 작은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너는 어떻게 용케-"
  "……."

  몇 번이고 그녀가 입 속에서 중얼거리던 것들은 결국 내 귀에까지 들어오지는 않았다. 설명을 바랬던 것일까. 아이의 죽음을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것을. 아니면 그 후에도 살아있는 자신에 대해. 물어본다면 곤란했을 거 같기도 했다. 임신을 했다는 말에 성가신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인에게 갈 생각이던 남자가 화를 내다 못해 계단에서 아내를 떠밀었다는 타인의 이야기는 안 그래도 비참과 폭력의 시궁창에 서있는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게외보르트의 왕실이나 그 풍습에 대해서는 아주 모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딤니팔에서 일어난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그들의 이해 가지 않는 풍습은 요란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아마도 왕은 외르타의 존재를 공식으로 선포하지 않은 채로 아이도 그녀도 궁에 놓아두고만 있을 뿐이겠지. 떨리던 손끝이, 남의 아이의 죽음에 유독 민감하던 그녀의 반응이 그 날, 망막에 새겨져 고스란히 남았다. 마치 그 후에 닥쳐올 미래처럼.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 시간의 일들을 회고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 방 안의 물건들을 묘사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남아있던 아델의 작은 침상과 장난감들을 끌어안고 있던 어머니를. 짐승 같은 울음과 소음에 다가가던 시녀들이 모두 크고 작은 상처들을 가져와 내게 보이던 일들을? 손가락 사이로 보이던 붉은색 천을 쥔 채로 씻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던 그녀를 보며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라고 빌던 나를?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살려두라-명을 내린 그 남자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인가.

  망가지고 무너진 잔해 속에서 내가 본 것은 딸이 죽은 어머니가 아닌 유일한 삶의 의지를 완전히 강탈당한 한 사람의 유해였다. 문득 예전, 그 날 이후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으려 한 그 선명하고도 손 안에 가둬지던 작은 핏덩어리들이 떠올라 그녀에게 겹쳐졌다. 내 아이의 망해들. 삶의 그 무엇도 경험하지 못하고 스러진 붉은 잔해들. 죽음만이 시작과 끝이던 나의 아이. 살아있다면 틀림없이 저만큼은 자랐을 테지. 아델, 나는 내 생에 남을 상처가 두려워 감히 이름조차 지어줄 수 없었다.

  "외르타."

  내가 어찌 그랬을까. 내가 나임을 알면서. 내가 누군데 그런 어리석은 안심을 하고 너를.

  "외르타."

  오스트레반트 도르커 팔메. 진작 새겨진 그 말인데 삿된 희망을 품어 너에게 그런 걸 주는구나. 아팠을까. 너를. 어찌 네가.

  "외르타."

  나는 울고 있지 않았다. 다만 남은 흔적을 움켜쥔 작은 손 위에 내 손을 겹쳤을 뿐이었다. 위로를 하려던 것이 아니다. 동정을 말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단지 생애 가장 비겁한 짓을 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았다. 여기서 끝이면 그녀가 편해질 것을. 비극이라 해도 더 이상의 고통도 슬픔도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등을 밀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길에 그녀가 서있었다.

  "죽고 싶다면 독을 줄까요. 고통도 없고 효과도 빠른 것을. 원한다면 그 옷도 같이 묻어주겠습니다."

  온몸이 뒤로 떠밀렸다. 그 직후 바로 뺨이 화끈거렸다. 죽어가던 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 믿을 수 없는 힘이 덮쳤다. 바로 뒤를 이어 내 얼굴을 스치는 조각들. 간신히 일어난 그녀가 무너지듯이 내 옷깃을 양 손으로 잡아 매달렸다.

  "감히 네가 어떻게 그 말을 입에 담니! 여기까지 살아온 네가! 아델은, 아델이 그리 갔는데 내가!"

  거친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왕녀의 가슴이 오르내렸다. 앙상한 손가락들이 겨우 버텨나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바르작거리며 옷을 건드렸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아닌 빛이 돌아온 것에 나는, 웃었던 것일까. 눈앞의 몸이 크게 분노로 떨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마치 뱀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그러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생 로욜의 여름은 생각보다 지낼 만하다. 가끔씩 북의 사막에서 예기치 않게 불어오는 바람이 이곳까지 닿는 순간을 제외한다면 둘러싸인 강 덕분에 공기 자체는 올라가지 않는다. 오히려 습함이 더 문제가 될까. 간신히 지난주에야 끝난 장마에 쑤시던 허리도 제 저항을 멈춘 터였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화려하게 장식된 복도를 걸어가고 있으니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성격상 근처에 누가 있으면 바로 바로 아는데 유독 이 사람만큼은 그 기척을 잡은 적이 드물었다. 블랑쉬, 그녀였다. 싹싹한 성격 덕분에 출신은 미천해도 위에서 맘에 들어 한 분이 많다고 최근 귀에 많이 들어오던 터였다.

  "무슨 일이죠?"
  "왕께서 부르십니다. 시녀장께서 전하시더군요."
  "알았어요. 가보죠."

  특별히 명을 더 받지는 않았는지 자연스럽게 그녀가 내 뒤를 따라왔다. 발걸음 소리가 작게 그리고 천천히 나는 것이 참으로 독특하였다.

  왕이 부른 장소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그 분의 공식 집무실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매일매일 왕비에게 들린 듯 보석으로 화려히 장식한 경장을 차려 입고는 특별히 외지지도 엄중한 곳도 아닌 연회실에서 앉아있었다. 강렬할 정도의 적발과 위압적인 체구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네가 리타의 곁에서 가장 오래 머문 의원이라지. 잘 알겠군. 제가 어찌 감히 왕비 전하와 친분을 논할 위치이겠습니까. 송구스럽습니다. 사실 나는 그 동안 본의 아니게 눈앞의 남자의 다양한 흔적을 보아왔지만 실제로 정면에서 마주보고 대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왕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항상 그 자리에 남겨진 난폭함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단정하고 정돈된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매양 그녀에게 해왔던 수년의 반복적인 파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깥의 고귀한 여성들과 시녀들의 마음을 애달프게 만드는 데에는 여기에 가장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동안 봐왔을 텐데......리타에게 무언가 달라진 것이라도 있더냐. 무엇이든 좋다. 고하라."

  고개를 숙이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 덕분에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를 들키지 않고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오는데 수초가 걸렸음에도 안도했다. 왕과 왕비는 참으로 정다운 사이였다. 그 동안 첩 가운데 그나마 높은 지위를 유지하던 방스키외 부인의 처지가 단번에 몰락했을 정도로 왕비에 대한 총애는 왕실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지금도 보라. 바쁜 나날에도 불구하고 잠깐만이라도 들려 비의 사랑스러움을 즐기고 가는 왕의 태도는 모범과 부러움의 반석을 다져가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다. 짧은 시간의 변화가 첩첩 하게 쌓인 수년의 과거를 빠르게도 지워나가는 것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팔에 멍과 상처들을 만들던 손이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리는 깃털을 다루듯 변해 왕비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저항을 볼라치면 독방에 그녀를 던지던 자가 가장 부드럽고 가장 비싼 비단으로 방을 둘러 그 안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들로 장식하여 빛나게 하였다. 그렇다고 집착이 변한 것이 아니다. 감정이 달라진 것도 아니다. 단지 그 표현이 달라졌을 뿐, 왕이 왕비에게 가지는 무언가는 형태도 크기도 변하지 않은 채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왕녀가 웃으며 말한 적이 있었다. 그가 그랬지. 그 끔찍한 걸 두고서 사랑이라 부르더구나.

  깊고 끝을 알기 어려운 눈동자가 내게서 조금이라도 허튼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희미한 불안과 반대를 용납하지 않는 단호함을 지닌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 라르디슈의 왕. 라르디슈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강한 왕, 내 나라의 왕이, 동시에 사랑이라 칭하는 이름하에 많은 일을 행사한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좀 더 깊이 고개를 숙여 복종에 모자람이 없도록 바닥에 꿇어 부복하였다. 종이 감히 말하던데 왕비 전하께서는 예전과 달리 항상 족하시어 행복하다 스스로 이르는 것에 주저함이 없으십니다. 머리 위의 공기가 부드러이 변하여 살짝 달뜬 공기로 변해가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았다. 하찮은 의원의 말에도 의심 하나 없이 바로 믿으시는가. 지금이라도 용납될 것이다. 나는 조금 웃었다.

  "그대가 오랫동안 리타를 돌본 것을 안다. 마땅한 포상이 있을 것이다. 물러가라.”
  "영광이옵니다. 전하."

  문가로 물러나 바로 뒤를 이어 나온 전하가 사라질 때까지 내 얼굴이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왕이 자리에 일어나 가는 곳은 아마 집무실 방향이 아닐 것이다. 새로이 확인된 행복을 음미하기 위해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함이겠지. 그를 보고 입가에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달려올 왕비가 눈에 선히 그려졌다. 그리고 남자가 떠난 뒤에 행여 시녀들에게 보일까 방석으로 가린 그녀의 얼굴이 얼마나 차갑고 참혹하게 변해있을지도. 또 올라오는 구토를 참아내며 물을 마시고 계실 것인가. 그 날 이후로 그 분과 두 번 다시 사적인 대화를 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몸을 돌보는 일을 제외한다면 왕녀와 나 사이의 말수는 이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딱 한번 재봉 도구를 가져다 달라 시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건네 적이 있을 뿐 정말로 그뿐이었다.

  "블랑쉬?"

  아직도 옆에 있는 시녀가 아주 조금 평소와 다른 기묘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말에도 침묵하던 그녀는 잠시 후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나 복도 저 편으로 사라졌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어깨에서 가슴까지 모두 가려버리는 다소 촌스러운 시녀의 베일이 등 쪽에서 흘러 마지막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문득 나 이상으로 여기에 오래 머문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교분을 쌓아본 적이 없는 것을 깨달았지만 깊게 생각할 일은 없었다.

  차가운 바닥의 냉기가 얇은 신발을 타고 올라와 시원한 것이 기분이 좋았다. 낮에도 불구하고 침침한 길을 지나 햇살이 아낌없이 내리는 정원으로 들어갔다. 나이가 든 탓인가 아무래도 따뜻한 장소에 있는 것이 몸을 가누기도 움직이기도 한결 편했다. 왕은 행복할 것이다. 왕비 역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며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어떻게 되든 무엇이 되던 그녀가 노력한 바대로 이루어진다면 자신 또한 급류에 휩쓸려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그것을 기다리는 게 즐겁다면 이상할까. 나는 잠시 눈을 감은 채로 햇빛을 받으며 진심으로 두 사람의 행복한 지금이 가급적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참으로 나른하고 만족스런 오후의 한 때였다. 

  복수, 이 얼마나 유쾌하고 기꺼운 말인가.


  終